국내여행

춘천 신장절공 묘역(申壯節公 墓域)

콩지88 2014. 8. 9. 11:47

 

 

 

고려 대사 장절공 신숭겸의 입상(高麗大師壯節公申崇謙之立像) 입니다

춘천애니메이션박물관과 가까운 차로 5분 거리에  있습니다

 

 

사당의 일부가 보입니다

 

 

사당으로 가지 않고 홍상문이 있는 곳으로 해서 묘소로 먼저 갔습니다

홍살문 가는 길에 만난 작은 연못입니다

 

 

 

홍살문 입니다

 

 

 

사극을 좋아하는 분들은 왕건과 신숭겸의 전쟁터에서 옷 바꿔 입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묘역의 배치도 입니다

 

 

사당 출입구ㅜ의 오른 편으로 돌아 갑니다

 

 

 

 

 

 

또같이 만든 세 개의 봉분이 눈에 보입니다

 

 

이야기 좋아하는 분들은 금두상이 있는 묘를 도굴꾼들이 모르도록 감추기 위해서 똑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3개의 봉분을 만들었다고 말 합니다

 

 

해설사가 이 곳 방동리는 장절공의 묘역이 명당자리이지만 이 동네 전체도 명당자리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동네에서만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재가 50명 가까이 나왔으며

최근의 한승수 전 총리도 그 중의 한 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제가 하나 더 보태기를 그 분은 UN주재대사로 계실 때 의장직을 맡아서 대표로 노벨평화상도 받은 분이기에 우리나라엔 노벨평화상 수상한 분이 둘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ㅎㅎㅎ

(화천 평화의 댐 종의 공원에 가면 세계 노벨평화상 역대 수상자들 얼굴과 손을 부조로 만들어 놓은 것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평산 신씨(平山 申氏) 들은 또 이런 이야기도 하곤 합니다

어느 벼락 치고 번개 천둥이 요란했던 한 밤 중에 놀라서 깬 묘지기가 비 쏟아지는 밖에 나가보니 도굴꾼들이 도굴을 하려고 준비하다가 묘지기가 오는 것을 보고는 줄행랑을 쳤다고도 합니다. 이것은 하늘도 이 평산 신씨의 시조가 계신  명당 자리를 잘 보전해 주는 것이라고 말 합니다

 

 

 

 

 

 

 

 

 

 

 

고려 대사 장절공 신숭겸지묘(高麗大師壯節公申崇謙之墓) 비석 입니다

 

 

 

 

 

일행들이 봉분까지 올라오지 않고 버스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자 저는 얼른 사당과 그 주변을 사진에 담으려고 잽싸게 다녔습니다

 

 

장절사(壯節祠) 입니다

 

 

신도비 입니다

 

 

 

상충재(尙忠齋) 입니다

 

 

 

 

 

전사청(典祀廳) 입니다

 

 

이화당(怡和堂) 입니다

 

 

돌아가면서 다시 본 연못 입니다

 

 

 

신장절공 묘역과 율리사

 

장절공은 전남 곡성 용산재가 틴생지이며,

대구 동구에 있는 표충단(대구광역시 기념물1호)은 장절공이 순절한 곳

춘천 선면은 신장절골의 묘역이 있는 곳

대전의 율리사는 시조 신승겸과 조선시대 병조판서를 지낸 신철, 신오 등 문증을 모신 곳

장절공 신승겸은 고려 태조 왕건과 함께 대구 공산 전투에서 견훤과 싸우다 위기에 처하자 옷을 바꾸어 입고 태조 왕건을 탈출시킨 후 대신 전사하니, 문종 2년(1048) 장절공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율리사는 평산신씨 시조 고려 개국공신 태사 장절공 신승겸(?~927)과 조선시대 병조참판을 지낸 신철(1588~1674) 신오 등 7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고려시대의 장군 신숭겸을 중심으로 평산 신씨 7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원래는 문중사당으로 세덕사라 불리웠다. 신숭겸(?∼927)은 몸집이 크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포위당해 태조 왕건이 위급해지자 대신 왕건의 옷을 입고 싸워 전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조선 철종 1년(1850)에 세덕사를 지어 모셨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18년에는 율리사로 바꿔 다시 지었다. 율리사는 앞면 3칸·옆면 1칸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안에는 신숭겸 등 7인의 위패와 신숭겸 영정을 모시고 있다. 그 외에 내삼문, 강당, 율리세덕사유허비 등이 남아 있다.

 

고구려고분은 시간이 모자라 둘러보지 못하고 다음 기회로 남기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