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北周)의 문제인 우문태(禹文泰)의 묘가 있는 산서성 부평현(富平縣)을 찾아 갑니다
서위(西魏)의 실권자로서 북주를 세운 우문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문태의 묘와 묘비 입니다
북주 문제(北周文帝)라고 써 놓은 비 입니다
선비족은 호한(胡漢)의 균형을 맞추기에 적극적이었고, 문화수용도 무척 개방적이어서 한족과의 결혼도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광롱집단에 대하여 설명을 해 놓았습니다
수나라를 세운 양제나 당나라를 세운 이연 모두 이 관롱집단의 출신 입니다
관중은 지금의 서안 주변을 말하며, 롱은 감숙성을 말 합니다
우문태의 가계보 입니다
수 문제의 가계보 입니다
당고조 이연의 가계보 입니다
우문태는 북주의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그 자손이 북주를 건설 합니다
즉 관롱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북주를 세우고, 수나라와 당나라 건립하는데도 이 관롱집단의 역할이 컸습니다
관롱집단은 어쩌면 당시에 싱크탱크 역할을 했다고 보겠습니다
북위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
불교는 후한시대에 서역을 경유하는 실크로드를 거쳐 전래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초기의 중국 불교는 서역의 색채가 많았습니다.
위진시대에 와서 불교가 상당히 흥성하였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란 개념이 도가(道家)의 “무(無)”와 유사하다고 보았고,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100여 년간 전쟁을 겪으면서 민생이 고통속에서 힘들었던 시기였으므로, 정서적으로 불교에 가까이 가서 쉽게 의존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산서성의 대동(大同 따통)에는 중국 3대 석굴의 하나인 운강석굴(雲岡石窟)이 있는데 1km의 사암 절벽에다 40개의 석굴을 파고 5만 여 개의 불상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북조에서는 “황제는 여래“라고 하면서 황실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려고 한 속내가 보여지는 대목입니다
담요오굴이 시작 됩니다
북위의 인물 문제 등 5명의 황제 얼굴이 16굴에서 20굴 부처님 처럼 석굴에 모셔져 있습니다
중국의 복수 성(姓) 중의 하나인 拓跋(척발)을 이 프로에서는 탁발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북위가 수도를 낙양으로 옯겨 가서도 석굴 만드는 일이 계속되었으니 바로 용문석굴(龍門石窟)입니다
역시 3대 석굴의 진수인 돈황 막고굴 이외에도 맥적산석굴, 중경의 대족(大足) 석굴, 병령사석굴, 천산남로 쿠처의 키질석굴, 그리고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 등은 제 포스팅에서 다시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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