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는 여러 면에서 무척 개방적이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도 불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 받아들였고, 이민족의 래왕에도 문호가 열려 있었습니다
섬서성 서안에는 회족거리가 지금도 있으며, 이슬람 사원인 청진사(淸眞寺)도 남아 있습니다
청진사의 현판 입니다
시간에 맞추어 예배를 드리는 이슬람교 신도들 입니다
이슬람 문자로 청진사를 붓글씨로 써 놓은 현판 입니다
서안은 당나라 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인구 100만 명의 국제도시로 오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클린턴 내외가 중국을 공식 방문할 때 첫 기항지가 북경이 아닌 서안이었습니다
ㅅ안의 재래시장의 한 면 입니다
진시황제의 병마용들 모사품들은 서양인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서안에서 약 40km 떨어져 있는 함양(咸陽)에는 한(漢)대의 릉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나라 묘에서 발굴한 부장풍들 입니다
호한융합이란 胡漢融合을 말 합니다
서안 성곽에 오르면 어느 방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서안의 비림(碑林)박물관 주변에는 서예 관련 용품과 그림 복제판과 서예 탁본들을 많이 팝니다
민속공연을 보는 것은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흉노도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선비처럼 수도까지 낙양으로 옮기고, 성(姓)도 한자 성으로 바꾸는 등 한화에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팁
북방의 유목민족들인 흉노,선비, 거란,몽골,여진등의 제국건설 외에 많은 국가가 세워졌다가 패망하고 없어지는 부침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서 우선 연대를 제대로 맞추어 정리를 간단히 했습니다.
이해에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304년 병주 흉노의 수령인 유연(劉淵)이 좌국성(左國城 지금 산서성의 이석(離石))에서 기병하여 병주의 땅 대부분을 장악, 영가5년에 낙양을 함락시키고 309년에는 장안을 진격하니 민제가 항복하므로서 서진은 멸망하였습니다. 유연이 세운 나라 이름은 한(漢), 자신은 한왕이라고 했습니다
318년 관중에 주둔해 있던 유료는 한(漢)을 멸하고 전조(前趙)를 세웠고 황제라고 칭하고 북방 정통의 통치자라고 했습니다. 전조는 관롱과 병주에 있던 저,강,파,갈 등의 유목민들과 전쟁을 하여 정복을 하자 장안으로 이주시켰습니다.
329년 갈인(羯人) 석륵(石勒)은 유연에게 투항한 바 있었으나 전조(前趙)를 멸하고 후조(後趙)를 세우고 도읍을 업성(鄴城)으로 정하고 황제라 칭하였습니다
여진족은 원래 흑수말갈(黑水靺鞨)로서 5,6세기부터 흑룡강과 송화강, 백두산 기슭에 걸쳐 살았습니다. 8,9세기에 이르러 속말말갈족(栗末靺鞨族)이 세운 발해국에 속해 있었는데 11세기 전기에 요(遙)가 발해를 멸하자 이들은 여진(女眞)으로 알려집니다
요의 호적에 편입되어 요양(遙陽) 이남으로 이주한 여진족을 숙여진(熟女眞)이라 하고, 이주하지 않고 요의 호적에 편입되지 않고 남은 자들을 생여진(生女眞)이라고 불렀습니다
앞 포스팅에서 소개한 우문태(宇文泰)는 선비별부(鮮卑別部)라고 불리우는 우문부(宇文部) 사람입니다. 535년에 효문제를 독살하고 실권을 장악하고 따로 문제를 내 세우니 서위(西魏)의 시작입니다
북조(北朝)의 변방 민족 유연(柔然)
유연(柔然)은 동호(東胡)에 속하는 묘예(苗裔)로 통치자의 성은 욱구려(郁久閭)입니다.
북위 도무제(道武帝) 때는 척발씨의 남진이 이루어지는데 유연의 영토 또한 확장되었으니 서쪽은 서역 땅, 동쪽은 조선 땅,북쪽은 고비사막 끝까지 그리고 남쪽 또한 사막에 닿았습니다.
북위 정광 원년(520년)에 유연에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의 돌궐과의 전투에 패하고 나서, 서위 공제(恭帝)2년(555년)에는 돌궐에 의해 유연이 패망하고 맙니다. 유연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북방 민족들과 융합하여 지내던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수나라의 통일
581년 양견(楊堅)은 주 정제(周 靜帝)를 위협하여 제위를 양도하도록 하여 수(隋)나라를 세웁니다.
588년 군사 50만으로 진(陳)나라를 총공격하여 무너뜨리고, 남방 지역도 평정하니 200여 년간 지속된 분단의 남북이 589년에 통일이 되었습니다.
수문제는 598년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물과 식량부족에 군대에 전염병이 돌아 실패하고 돌아갔으며, 612년 2월에서 7월까지 113만(?) 명의 군사를 끌고 수문제가 직접 주력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요양(遙陽 요령성의 요양)을 함락하지 못했고, 우문술(우문술)과 우중문(우중문)이 이끄는 35만5천의 군사는 평양 가까이 진군하였으나 식량이 도착하지 않았고, 고구려군사에 포위되었다가 퇴각하다가 살수(薩水 청천강)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패하였는데 살아서 요동으로 도망간 자는 3천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그 유명한 고구려의 살수대첩입니다.
이후에도 고구려 침략을 준비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납니다.
수문제는 604년에서 610년 기간중에 낙양을 건설하고, 이궁(이궁)을 보수하고, 장성을 쌓고, 운하를 파는 등 연인원 100만 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하였다고 하니 국력이 소진되는 것은 당연했고, 전국에서 농민의 기의가 있었으니 수왕조의 몰락은 시간문제 였습니다
수양제가 피살되고, 이연은 장안에서 황제로 칭하면서 당나라를 세웁니다. 이 자가 당 고조입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주변의 변방 민족 평정과 지방의 기의군 진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에 이어 전국을 통일한 당(唐)의 시대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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