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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韓信) 사당 병선전(兵仙殿)

콩지88 2015. 1. 8. 10:15

 

 

 

 

 

 

뛰어 난 병술과 전략으로 초한 전쟁을 한나라의 승리에 크게 공헌한 한신을 모셔놓은 병선전(兵仙殿) 입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의 유래

 

 

한왕 유방이 어느날 한신에게 물었습니다

 

“보기에 나는 군사 얼마를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가 생각하기엔 천 명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신 그대는 어떻소?”

 

“네, 저는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유방의 눈살이 찌프러지는 것을 본 한신은

 

“한왕께선 저 같은 장수 천 명을 지휘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군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뜻이었

 

습니다” 라고 하여 유방의 심기를 갈아 앉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옵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유래

 

 

한왕 유방이 한고조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논공행상도 대대적으로 이우어졌습니다. 한신에게는 초왕(楚王)으로 봉

 

하면서 북쪽 흉노의 변방으로 보냈습니다

 

한고조의 입장에선 한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으니 너무 가까이에 한신을 두면 언제 역모를 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한신은 변방 흉노의 지원을 받으면서 결국은 반란을 일으켰고 한고조 11년 봄에 한의 시장군(柴將軍)과

 

 의 전투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항우와의 수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많이 세운 한신은 이젠 더 이상 한고조에겐 필요가 없으니 변방으로 멀리 내

 

친 격이 되었습니다. 사냥꾼은 사냥할 토끼가 없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사자성어가 이렇게 만들어 쓰여 오고 있

 

습니다

 

.

오늘날에도 토사구팽이란 말은 우리나라를 위시해서 세계 어느나라에서나 정치권의 자리다툼 문제에서 아주 자주 등장

 

합니다.

 

 

돌다리 위의 정자가 멋집니다

 

 

 

 

 

바위에다 韓信과下受辱處(한신과하수욕처)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젊었을 때 한신은 훤칠한 키에 항상 큰 칼을 차고 동네를 지나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신이 다리를 건너가려고 다리 근처에 왔을 때 그곳에 있던 건달들이 길을 막으면서 말 했습니다

 

 

“야 ~ 이 건방진 놈아 맨 날 큰 칼 차고 으스대며 걷는 꼴 봐줄수가 없다.

 

오늘 네가 이 다리를 건너가려면 그 칼로 나르 찌르고 가던지 아니면 용기가 없어 못찌르겠다면 내 바지 가랑이 아래를

 

기어서 가라“

 

 

 

한신은 잠시 생각하고는 그 건달의 바지 가랑이 아래를 기어서 다리를 건넜습니다

.

마음 속으로는

 

 

 “내가 더 큰 일을 할 때나 이 칼을 뽑아야지 이런 자리에서 함부러 칼을 뽑을 수야 없지 않은가” 하고 생

 

각하면서 굴욕을 참고 기어갔습니다

 

 

 

 

바로 이 다리가 굴욕을 견디면서 건넜다는 과하교란 이름의 그 다리입니다

 

과하교란 다리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겠지요?

 

한신은 훗날 이 건달들을 만난 적이 있으며 그 때 자기에게 바지가랭이 밑을 기어가게 하면서 보다 큰 일을 하기 위해서

 

인내(忍耐)를 갖도록 해 주었던 일에 감사를 크게 표했다고 전해 집니다.

 

 

 

 

 

 

 

 

 

 

 

 

 

 

 

 

 

 

 

 

 

 

우미인과 초패왕(楚覇王) 항우의 상 입니다

 

 

 

 

 

우미인(虞美人)을 생각해서 후세의 사람이 지었다는 시 한 수를 여기 추가로 소개합니다

 

 

漢兵已略地, 四方楚歌聲

 

大王意氣盡, 賤妾何聊生?

 

 

한병이략지, 사방초가성

 

대왕의기진, 천첩하료생?

 

 

 

한병은 이미 초나라 땅을 차지했고 사방엔 초나라 노래소리뿐이구나

 

대왕의 기개도 다하였으니 천첩이 무엇 때문에 더 살기를 바라리오

 

 

 

우희(虞姬)가 죽은 후 우희의 무덤이 있는 곳에서 가냘픈 풀이 싹이 나서 자라니

 

사람들이 이 풀을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