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北京 Beijing)

북경,원명원 유적들 6

콩지88 2020. 10. 24. 18:47

황화진에 있는 정자 입니다

 

원명원(圓明園)

원명원 원림은 기춘원(綺春園) 장춘원(長春園),원명원(圓明園)을 중심으로 한 청나라황실의 정원 통칭입니다. 세계원림에서도 뒤지지 않을 동방의 베르사유궁으로 칭송되던 중국 최고의 원림이었습니다. 그러나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약탈 그리고 19008국 연합군의 또 한 차례의 싹쓸이 약탈에 이어서 불까지 질러 당시의 모든 보물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기춘원(綺春園)

원명원은 명나라 때에도 황실의 원림이었으나 청대의 강희제 때 아들 윤상(允祥, 후에 옹정황제에 오름)에게 이곳 땅을 하사하면서 기춘원의 확장 역사가 시작되며, 가경황제에 이르러서는 확장세가 최고의 전성기를 보였습니다

 

1986년 복원사업으로 신궁문(新宮門), 감벽정(鑑碧亭),선인승로대(仙人承露臺)등이 과거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선인승로대는 한 무제 때부터 도가(道家) 학자들의 말에 따라 선인들이 받힌 구리 판위에 고인 이슬을 받아 마셨다는 것인데 불노불사 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런대 제거 본 자료에서는 탑 위의 동판에 고인 이슬은 사실은 밤 사이에 진드기들의 소변이 모인 것아었다고 하며, 맛은 달짝지근하여 감로수(甘露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원명원에 소장되어 있던 그림,도서,예술품 등의 보물들은 프랑스 모든 성당의 보물을 다 합쳐도 원명원에는 견줄 수 없다고 (빅톨 유고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체의 원명원은 청나라 옹정황제 때 원림의 조성이 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어 건륭황제와 가경황제에 이르기 까지 150년의 세월에 걸쳐 확장을 해서 부지면적이 350m2 그리고 이 중 1/3이 물이 차지했습니다

 

1976년에 원림의 녹화와 인공호수의 복원이 일부 이루어지면서 1988년에는 대외개방을 하기에 이르러 공원으로서 오늘의 원명원이 되었습니다.

물론 원명원의 옛 모습을 다 복원하려면 오랜 세월이 흘러가야 할 것이지만 중국 정부는 복원계획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봉린주(鳳麟洲)

봉린주란 중국의 고대 신화에 나오는 해내십주(海內十洲) 중 하나에서 가져 온 이름인데, 아 섬에는 봉황과 기린이 산다고 했습니다. 가경황제는 원명원에서 서해 쪽에 위치하는 가장 좋은 피서지라고 했는데, 섬은 소용돌이가 있는 물로 둘러져 있어서 아무나 쉽게 접근을 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옛 이야기는 거의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지금 기린은 간 곳이 없고, 봉황 대신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사료를 받아먹는 비들기들의 사육장이 되어 있습니다

 

원명원

원명원은 그 부지가 210ha로 넓으며, 동쪽의 복해(福海)는 동서 600m의 정방형으로 호수 중에서 가장 넓으며, 유람선을 타면 연꽃 단지를 따라 옛 유적지를 눈으로만 둘러보게 됩니다

한편 이 복해에서는 매 년 단오절에는 용주(龍舟)대회를 개최합니다 (옛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屈原)을 상기하는 행사로 이 날은 전국적으로 쫑즈(粽子)를 만들어 먹음), 중추절에는 공양을 위해서 초롱의 하등(河燈)을 물에 띄우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사는 여행자들의 시간과 잘 맞아야 함께 즐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별유동천(別有洞天)은 복해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옹정황제 때 불로사 한다는 단약(丹藥)을 만들었던 곳입니다.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1985~1992년에 걸쳐 일부를 복원한 것입니다

 

장춘원(長春園)은 북쪽에다 1766년부터 7년에 걸쳐 70m2의 서양루경구(西洋樓景區)를 조성하였습니다. 해기취(諧奇趣), 황화진(黃花陣), 방외관(方外觀 10여 동의 서양식 건축물들과 20여 곳의 정원으로 7m2의 부지 위에다 조성한 것입니다. 정원을 조성할 때 소주.항주의 사자림과 소유천원(小有天園), 남경의 여원(如園) 등 전국의 명경을 모방하여 20여 곳에다 만든 것 입니다 현재 보는 장춘원의 모습은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약탈과 방화도 타서 소멸되고 지금은 돌 기둥과 당시 사용했던 돌들만 여기 저기 쌓여 있습니다. 산의 형태와 호수의 옛 경관 복원은 1차 복원 공사가 1992년부터 2년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원래의 서양루 건축물들은 이태리의 선교사 쥬세페 카스틸리오네와 프랑스인 미셸 뻬로이스트의 설계에 따라 건륭황제 때인 1747~1749년 기간에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이 서양루는 백석을 다듬어서 사용했는데 지금도 바로크 형식의 조각 도안 모양을 기둥 등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붕은 중국식으로 유리기와를 올려서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모양을 갖추었고. 건물 안 장식도 중국민족 전통예술을 채용하였다고 했습니다

 

대수법(大水法)은 관수법(觀水法)이라고도 부르는데, 건륭황제가 서양루에서 남쪽 멀리를 바라보면서 분수대에서 하늘로 향해서 뿜어 올라가는 분수를 감상하곤 했다는 장소입니다. 이곳에는 황제가 앉는 자리인 보좌대(寶座臺)가 있고, 그 뒤로는 돌을 깎이서 만든 네모의 병풍과 양 쪽에 바로크 장식의 문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대수법(大水法)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의 아름다운 물줄기를 감상하는 황제의 공간입니다. 돌 의자와 5개의 큰 돌을 깎아서 만든 병풍과 한백옥(漢白玉) 방탑(方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못이 꽤 큽니다. 이곳은 분수대가 있었던 자리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건륭황제가 남쪽 멀리 내다보면서 분수가 치솟는 것을 감상했다는 황제만의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거대한 반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황화진(黃花陣)

황화진은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유럽 식의 미로(迷路)입니다

남북으로 89m, 동서로 59m 이며,담장의 높이는 1.2m로 만()자 무뉘의 벽돌로 쌓았는데 미로의 총 길이는 1,600m입니다

1989년에 복원이 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미로의 담 위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원명원은 워낙 넓은 곳인데다가 지금은 복원된 아취형의 다리와 산수 외에는 유적만이 남은 곳이 많고, 설명자료들도 제 눈에는 잘 보이질 않아서 제가 걸으면서 담은 사진을 참고로 올려드리니 다음 원명원이 다 복원이 되면 그 때 이 사진들을 회상하면서 즐기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