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北京 Beijing)

북경,원명원 찾아가기 2

콩지88 2020. 10. 18. 16:33

원명원(圓明園)

 

원명원은 원명,장춘,만춘(圓明,長春,萬春) 세 원의 총칭인데, 청 강희황제 때 시작하여 옹정황제,건륭황제 등 6대 황제에 걸쳐 333ha(346만m2)의 부지면적(길이가 10여 km)에 150년의 오랜 세월 동안 조성한 곳입니다. 부지면적의 1/3이 인공호수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원명원 안에는 전후에 인공호수가 만들어져 있으며, 호수 주변의 길을 따라 조성된 대규모의 연꽃단지는 연꽃이 피는 계절이면 정말 환상적인 경관이 연출되는 곳입니다. 아직까지 원명원만큼은 대외 개방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배를 타고서 또는 걸으면서 복해(福海)의 주변 경치는 볼 수가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전 주은래총리의 지시에 따라서 폐허의 맨 땅에 조림,조경을 하면서 정리가 많이 되었고 1988년부터 대외에 개방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관되어 있는 원명원 40경(景)의 문헌에 따라서 원명원을 원상대로 복원하려는 구상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지하철 1호선의 국무역(國貿站)에서 10호선으로 환승을 하려고 빠꺼우(巴(水+勾))방향에 섰습니다

황장(黃庄)역에서 다시 4호선으로 환승하고 원명원 역에서 내릴 것입니다.

1호선의 서단(西單) 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해도 됩니다

 

 

 

 

 

원명원 역에 도착하면 벽에다 원명원을 소개하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1860년은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원명원을 급습하여 보물을 약탈 했던 해입니다

 

 

 

1900년은 8개 연합군이 원명원을 1860년에 이어서 두 번째로 침입하여 대대적인 약탈을 했던 해입니다

 

 

1900년에는 8개국의 연합군이 또 침입하여 소장된 보물을 싹쓸이를 하고는 약탈을 은폐하기 위해서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은 밤낮 이틀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해감으로써 원명원은 완전히 폐허로 변했습니다.

 

 

 

 

 

원명원의으로 나가는 출구는동북 쪽의 B입니다

 

 

 

서들지만 않으면 여러 안내 글과 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원명원 매표소 옆에 어느 젊은이가 재미있게 그림으로 원명원 입장에 대해 설명을 해 놓았습니다

 

원명원은 청화대학과 가까우며 북경대학도 부근에 있습니다. 이화원 가는 길과 갈림길에 원명원 입간판이 크게 나오므로 자동차를 몰고 와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매표소가 보입니다. 입구는 오른쪽입니다

 

 

 

10월 초여서 국화꽃들이 주위에 많이 보였습니다

 

 

표는 25원 짜리 통표(通票)를 사야 합니다

10원 짜리 문표(門票)는 원명원 입장권이며 안에 들어가서 다른 유적지를 보려면 일일히 표를 따로 사야합니다

 

 

 

수 백 개의 누(樓)와 전,각,대,정자(殿,閣,臺,亭) 등이 만들어졌고, 호수와 어울려 복해(福海)로 불려지며, 원(園) 안에 원(園)을 만들 때는 서호의 10경(十景)과 해녕(海寧市)의 안란원(安瀾園)과 (해녕시는 영파(寧坡) 가까이에 있으며, 바다의 조류 때 만들어지는 파도로 유명), 소주(蘇州)의 사자림(獅子林, 졸정원,유원,망사원 등과 함께 유명한 정원) 등의 가장 뛰어 난 곳만 모방하여 만들면서 건축면적만 16만m2입니다. 이 중에 서양식의 건축물로는 베르사이유궁전을 본 따서 화려하게 지어놓았던 바로크 스타일의 서양루(西洋樓) 등이 있는데, 한 마디로 원명원은 북경 제2의 황궁이었습니다.

 

 

서양루(西洋樓)는 청 건륭 12년(1747년)에 시작하여 건륭 14년(1749년)에 완성하였는데, 원명원의 동북 쪽에 있는 장춘원 북단에다 만들었습니다.

백석(白石)으로 만든 건물의 뼈대와 일부 파편에서는 서양식 문양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건축물은 바로크 스티일의 서양식이지만 지붕은 중국식의 유리기와를 얹어서 중국과 서양의 혼합형이었다고 합니다

 

대수법(大水法) 서양루의 남단에 있으며, 건륭황제가 이곳에 와서 아름다운 분수경관을 즐겼다고 하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