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관광, 박물관

천안 순환관광버스 타고 2 (석오 이동녕선생기념관,왜가리 관찰지)

콩지88 2012. 3. 1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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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 선생께서 평소에 말 할 때 늘 자주 인용하였던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인 산류천석(山流穿石)의 글을 직접 써 놓은 것입니다.

 

 

석오 이동녕선생(1869~1940)의 기념관과 생가 및 주변을 사진에 담아 소개하여 드립니다

선생님 일대기 등의 소개 글은 뒷편에 올려놓았습니다


 


 
석오선생기념관 입구입니다
 


 
석오선생 초상화입니다
 


 


 
석오 이동녕선선생의 좌상입니다
 
석오선생 기념관 안을   쭈욱 둘러보고 나와 생가로 자리를 옮깁니다
 


 
석오 선생께서 평소에 늘 자주 인용하였던 산류천석(山流穿石)이란 말을 새긴 휘호석(가로 3m, 세로 5m)이 세워져 있습니다.
 


 


 


 


 
앞 마당에 조용히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모습입니다
 


 


 
마당 한 편에는 우물도 하나 있습니다
 


 


 


 


 


 


 


 


 


 

 
기념관과 생가의 중간 쯤에 관찰대의 안내문이 있으며 망원경이 두 대가 있으니 둥지 안의 왜가리를 찾아서 찬찬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선회하면서 나는 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첨엔 매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왜가리들이었으며 이곳이 왜가리 서식지의 하나였음을 알았습니다.

왜가리들이  여름이면 어디론가 피서를 가는지 모르지만, 보기가 드믈다는 이 때만 피하면 봄,가을에 언제나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망원렌즈로 찍었다면 더 근사한 왜가리들의 모습을 찍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ㅠㅠ
 


 


 
휘호석 앞에서 뒤돌아 본 기념관입니다
저는 다시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서 석오선생님의 기념사진 몇 장을 더 담았습니다
 


 


 


 


 
서울 효장공원에 있는 석오선생님의 묘입니다
 


 
석오선생님은 산류천석(山流穿石) 외에 광명(光明)과 대의(大義)란 글도 즐겨 쓰셨다고 합니다
 


 
석오선생님 관련 책들입니다
 



중국인사들과 서신을 주고 받은 친필 서한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선생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선생은 1869년 9월2일(양력 10월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의성 군수 등을 지낸 교육자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봉소(鳳所), 호(號)는 석오(石吾)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언론·교육활동, 청년회 조직 등을 통해 개화민권,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이후 조국의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전 생애를 바쳤다.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연좌데모 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른 후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였고, 귀국하여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0년 다시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해외 동포들의 힘을 모으고,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으며 무오독립선언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써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국호, 임시헌법, 관제제정, 민주공화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임종하시는 순간까지 의정원의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 등의 중책을 맡아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끄셨다. 또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당수로 정당통합 운동에도 노력하였다.

1940년 72세를 일기로 급성폐렴으로 중국기강에서 서거, 임시정부 국장으로

모셨고, 광복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하여,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광복운동의 일원화를 남기셨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석오 선생의 생애를 주요 시기별로 정리하였습니다

 

-천안에서 탄생한 후 한문을 익히고 상경하여 응제진사에 합격한 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때

-민권운동과 개화운동에 투신 한 뒤 제국신문의 논객을 역임하여 언론창달에 눈뜸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박탈되자 상동교회에 들어가 기독교인으로서 조약폐기에 애를 태움

-북간도(용정)에가서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운영,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앞에 나섬

-국권을 강점당한 전후 해외에 나가 독립투쟁을 전개한 시기

  부민단, 권업회,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운영

-대종교를 민족의 정통사상으로 받아들이고, 동포에게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을 체계적으로 견지

-50대 ~70대까지의 20여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 국내외를 효과적으로 다스려왔던 결산기

-군주제 청산, 민주공화제를 처음 실시하여 의회민주정치의 제도적 장치와 그 실천을 진두지휘했던 법통성의 첫 주자

-세 번의 의정원의장 등 입법부 수반을 역임

-그 외 각부 총장(장관), 국무총리, 국무령, 대통령대리, 주석 등 행정부수반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한 우익단체의 지도자 (1935.10~1940.10)

-백범 김구 등과 같이 독립투쟁과 한국독립당 등을 운영조직하면서 10여 곳의 임정 수도를 여건에 맞게 이동함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막후에서 김구로 하여금 계획 지도케 함 →임시정부의 내정, 교통, 군사, 외교, 교육, 문화, 사법, 재정 정책을 적절히 조절 집행하며 내외동포에게 자신감과 용기, 신념을 불어넣어 줌

 

(자료원 : 석오 이동녕선생 기념관의 브로슈어 내용)

 

 

 선생 기념관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 1869~1940)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선생은 1869년 9월2일(양력 10월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의성 군수 등을 지낸 교육자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봉소(鳳所), 호(號)는 석오(石吾)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언론·교육활동, 청년회 조직 등을 통해 개화민권,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이후 조국의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전 생애를 바쳤다.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연좌데모 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른 후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였고, 귀국하여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0년 다시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해외 동포들의 힘을 모으고,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으며 무오독립선언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써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국호, 임시헌법, 관제제정, 민주공화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임종하시는 순간까지 의정원의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 등의 중책을 맡아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끄셨다. 또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당수로 정당통합 운동에도 노력하였다.

1940년 72세를 일기로 급성폐렴으로 중국기강에서 서거, 임시정부 국장으로

모셨고, 광복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하여,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광복운동의 일원화를 남기셨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석오선생님의 기념관 건립과 생가의 복원으로 가까이 있는 독립기념관,유관순기념관 그리고 조병옥박사의 생가 등과 연계하면 뜻있는 역사교육을 겸한 호국관광코스가 됩니다. 시간 여유만 충분히 있다면 이들 기념관 주변의 산책코스까지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식사 때가 되면 병천 아우네 순대 한 접시와 순대국을 즐기면 하루를 보람있게 잘 보내었음을 느끼면서 귀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