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미술전이 전국적으로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사는 집하고 가까운 지하철 3호선의 경복궁역 서울메트로미술관에서 또는 경희궁 안의 서울시립미술관 별관에서 개최되는 서예전에 종종 들려서 서예작품들을 감상 하곤 합니다
근자에는 전서체(篆書體)와 갑골문자체(甲骨文字體)가 곧잘 눈에 띄기에 갑골문자에 대해서 소개 좀 해드립니다
갑골문자와 殷墟
중국 하남성의 안양(安陽)은 7대 古都(북경,남경,서안,낙양,안양,개봉,항주)의 하나다.
이곳은 기원전 16세기에서 11세기에 존재했던 商나라의 자리이고 나중에 殷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도읍지를 기원전 14세기에 안양쪽으로 옮기면서 이 지역 일대를 은허(殷墟)라고 부른다. 지금의 안양시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小屯村에서 1928년부터 과학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해서 찾아 낸 15만 편의 유물 가운데 들어 있는 갑골문자는 이미 3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갑골문은 지금까지 약 5천 자가 갑(甲,거북이 등껍질)이나 골(骨,주로 소의 허벅지 뼈)에다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로 확인이 된 글자는 약 2,200 여 자에 달하고 이 중에 해독이 가능한 것은 1,200여 자이다.
상나라의 갑골문을 처음으로 알아보고 발굴을 1899년부터 시작한 사람은 청나라 때의 왕의영(王懿榮)이란 학자이다.
원래는 소둔촌의 한 농부가 동물이나 거북의 등뼈에 새겨진 갑골문이 무엇이지 모르는 채 이것을 고가의 약재로 생각해서 약재상에게 팔았다.
왕의영은 우연히 약재상에서 거북의 등껍데기와 짐승의 뼈에 새겨진 문자를 발견하고는 이를 연구하면서 商代의 고대문자임을 처음으로 알아내고 학술발표를 하여 갑골문자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거북이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 넣거나 불로 지져서 쓴 갑골문엔 어떤 내용이 담겼나를 연구하여 밝혀진 것으로는 당시의 통치자가 점을 치거나, 제사를 지낼 때의 제문이거나 아니면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의 간단한 기록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상대의 갑골문이 중국 최초의 문자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로는 상형문자 보다 문자의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기 이전에도 갑골문자의 바탕이 되는 문자가 이미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어서이다. 한편 시기가 더 빠른 종정(鐘鼎)에 새겨진 종정문(鐘鼎文, 金文이라고도 함)은 갑골문자와 비슷한 모양과 뜻이 통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며,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 주변에서 갑골문 보다 천 년이 앞 선 4000년 전의 갑골문들이 소량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서안은 앙소문화(仰韶文化) 유적지의 하나로서 반파(半坡)에서 출토된 도기에 새겨진 부호 역시 연구 고증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관심있는 분은 반파박물관에 들러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제가 운남성의 여강 흑룡담(麗江 黑龍潭)을 포스팅하면서 소개한 동파문자(東巴文字)가 세계의 학자들이 동파서원에 와서 연구하고 있음도 우리는 관심이라도 한 번 가져볼 일이다 .
갑골문자의 사진들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음을 첨언합니다
이 글의 원자는 白雲作雨多如絮 紅葉驚風少似花 써 놓았습니다
絮(서)는 솜,솜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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