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미국 인디언 추장 크레이지 호스의 말 탄 조각 작업의 진행 3-2

콩지88 2016. 12. 25. 07:25

미국의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석상






















미국 골드러시 때 만들어진 엄청난 크기의 금광 흔적






지금도 채광작업장이 부근에 있나 봅니다






대규모의 묘지 입니다













1923년 사우스 다코다 주의 역사학자 로빈손은 사우스 다코다 주와 와이오밍 주의 로키산맥에 있는 블랙힐스(Black Hills)의 바위 산에다 미국 서부 개척에 공로가 많았던 인물들을 선정하여 조각할 것을 구상하고 당시의 유명한 조각가여였던 굿천 보글럼(Gutzon Borglum)을 초청하여 함께 상의하고는 미국의 대통령들 중에서 미국 서부의 자연보호, 파나마운하 개척,남북전쟁 승리와 노예해방 등으로 미국의 지위를 세계적으로 올려 놓았던 초대 조지 워싱톤, 3대 토머스 제퍼슨,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그리고 16대 에이브러함 링컨 등 4명을 조각하기로 했습니다

1927년8월 조각 작업이 시작되고(당시 대통령은 칼비 클리지(Calvin Coolidge) 4개의 석상 조각에서 얼굴 윤곽이 완성단계에 이를 무렵인 1942년 보글럼이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보글럼의 아들이 작업 처음부터 조수역할을 맡았던 점을 감안하여 이 작업의 감독직을 맡아서 14년이 지난 1941년 드디어 완공을 하게 됩니다

4명 얼굴들은 길이가 각각 18m나 되며, 이 작업으로 생긴 깨진 돌 조각들은 무게가 거의 50만 톤에 이릅니다.

이곳을 찾는 미국인들은 이곳을 “민주주의의 전당”이라고 부릅니다



4명의 대통령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러시모아(Mt.Rushmore 해발 1,750m)에서 27km 떨어진 러시모어 국립기념관 건너편의 산 블랙 힐스 산자락에는 전설적인 인디언 크레이지 호스(Crazy Hourse)가 말타고 있는 조각상이 지금도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1948년에 착공하여 1998년에 얼굴이 50년만에 만들어 졌지만 앞으로도 높이 171m, 폭 201m 얼굴 27m의 말을 탄 작품이 다 완성이 되기까지 100년이 더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870년대는 블랙힐스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그 자리에서 살아 온 인디언 수우족들에게 1976년1월까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일방적인 정부의 강제명령에 대항하여 사이엔 부족의 족장 시팅 불(Sitting Bull 웅크린 소)과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성난 말)가 이끄는 수우족 인디언들은 총포로 무장한 막강한 미 육군 제7기병대와 Little Big Horn에서 큰 전투를 벌였는데 카스터 장군 휘하의 병사 225명 전원이 전사하고, 인디언은 136명의 전사자와 160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미국의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전투 이야기입니다.


어느 백인이 승리한 크레이지 호스에게 “너의 땅은 어디냐?”고 힐란조로 묻자 “나의 땅은 내가 죽어서 묻히는 그곳이 바로 나의 땅이다”라고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지금 진행 중인 크레이지 호스의 말탄 동상 조각상이 팔을 앞으로 내밀어 손가락을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 대답을 바탕으로 한 것과 인디언들의 자존심과 백인에 대한 처절했던 저항정신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을 만들기로 한 폴란드계의 조각가 코작 지올코스키(Korczak Ziolkowski)는 1939년 뉴욕예술대전에서 1위를 했던 경력이 있으며, 4명의 대통령 얼굴 조각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당시 인디언 추장이던 헨리 스탠딩 베어(Henry Standing Bear)는 아메리칸 인디언 중에도 크레이지 호스와 같은 전설적 영웅이 있음을 바위에다 새겨 달라고 코작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서 코작의 생일 9월5일은 크레이지 호스가 죽은 날짜와 같다는 말을 덧붙여서 해 줍니다


미 제7기병대의 막강했던 전투력에도 활과 창으로 총포로 무장한 기병대의 병사 모두를 전멸시킨 전설적인 크레이지 호스와 그를 따르는 인디언들의 전투 이야기와 인디언들의 삶에 대하여 감동을 받은 코작은 그의 남은 일생을 크리이지 호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만드는데 다 바치기로 마음 먹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 작업에 동참해 줄 것을 열정적으로 그리고 거의 불가능 할 것 같은 이 작업에 도전하는 모습에 감동하고 자원봉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루스 로스(Ruth Ross)라는 여대생도 한 명 있었는데, 1950년에 결혼까지 하고 10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코작의 고된 작업에 내조를 열심히 한 부인입니다


(지올코스키 부부 모습,1980년)

코작이 처음에 이 대규모의 공사 작업을 추진할 당시 그는 겨우 174달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열정과 도전정신에 후원한 로사부인과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작업현장 입장료 그리고 기부금 등은 이 작업을 오늘날까지 중단없이 이어지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작업을 시작한 지 33년 되던 1982년 코작은 사망하였으나 그의 부인 로사는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코작의 뒤를 이어서 작업에 전념해오고 있습니다.

한 번은 얼굴 윤곽이 거의 만들어질 무렵 정부에서 1,000만 달러의 지원금을 제시하면서 후원의 뜻을 전했으나 로사는 남편 코작의 신성한 인디언 정신에 위배될 수 없는 것이라면서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유지를 어길 수 없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2006년에 만든 기금은 이미 1970만 달러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로사 부인은 말 합니다

이 작업이 앞으로 100년이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끝내지 못하면 내 자식들이 뒤를 이을 것이고, 그 때도 안 되면 손자와 손녀들이 이 작업을 계승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완공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중국의 우화 우공이산(愚公移山)

이 로사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중국의 우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우직한 노인네를 떠 올리게 됩니다

그 노인네가 사는 집 앞에는 산이 막아서고 있어서 가까운데도 길을 돌아서 가야 산 뒤 마을의 볼 일을 보고 와야 하는 불편함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노인은 혼자서 삼태기와 곡괭이를 들고 산 아래에서부터 땅을 파서 산 옆으로 판 흘과 돌을 옮기기 시작 했습니다.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이 나이를 생각해서 그 일을 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다 못하면 내 자식이 대신 이어서 하고, 그래도 다 못하면 손자손녀들이 이 일을 게속하면, 산이 자라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산을 완전히 다 옮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그 산의 신령이 크게 놀래서 밤사이에 자리를 옆으로 옮겨 잡았다는 이야기인데 로사 부인의 이야기와 아주 같은 논리입니다.

코작이 시작한 크레이지 호스의 말탄 동상 조각상이 사고 없이 순탄하게 완공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