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수민족

바람의 제국을 가다 25-1 여진족이 세운 청 ~2

콩지88 2016. 3. 16. 10:18



청니라가 남겨 놓은 문화 유적들 중에서 아래와 같이  사진들을 올려 드립니다

자금성은 청나라에서도 황궁으로 사용한 곳이기는 하지만, 명나라 영락제 

땨 지은 곳이고 많이 소개된 곳이기에 여기서는 그냥 넘깁니다.(북경 편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북경 시내에 있는 옹화궁 입니다. 옹정황제가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옹화궁 현판에 쓰인 글자들은 만주어,한어,티벹어,몽골어 입니다



                                                                


옹화궁의 내부는 큰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내부의 전시실을 둘러 보면 다리가 아플 정도로 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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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의 불향각 입니다

곤명호의 끝자락에서도 아주 잘 보일만큼 웅장하게 지어 놓았습니다

이화원은 서태후때 대대적인 보수와 확장을 하였습니다



1949년 10월1일 모택동이 이 천안문에 올라서 중화인민공확의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관리들은 변발을 한 것이 이색적 입니다

그리고 황제 앞에 나가서 알현 할 때는 반드시 한 손으로 팔 소매를 탁~탁 ~ 양 팔을 털어 보입니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표시 입니다



저 긴 변발을 신해혁명 후 신중국 초기에 단발령을 시행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화기 때 상투를 자를 적에 공자,맹자 읊던 이들은 무척이나 반항적으로 거부를 했었지요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이 세 황제 시절은 청나라 문화와 정치의 황금기였습니다





강희제는 8세 때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도 무척 깁니다

세 황제의 재위 기간은 합치면 134년 가까이 됩니다




하북성 승덕시에 있는 피서산장 입니다.

위 세 황제때 오랜 세월에 걸쳐서 건설하였으며,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정무와 외국 사절단을 접견할 때에 사용했으며, 조선에서 파견한 박지원도 청 황제를 만나기 위해 이 곳을 찾아 갔었고 귀국 후에는 열하일기를 남겼습니다



피서산장 주변에는 몽골인들과 티벹인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라마 사원 8개를 지었는데 이 사진은 그 중의 하나 입니다



천수천안 관음보살은 엄청 컸으며, 하나의 통나루를 깎아서 조각한 것입니다



티벹이나 몽골 사원에서 흔히 보는 건축 양식 입니다



북경 시내의 옹화궁과도 비슷합니다

북경 외성(外城) 밖에 있는 8채의 사찰이기에 외팔묘(外八廟)라고 부릅니다



서태후가 달 구경하면서 즐겼다는 곤명호에 띄어 놓은 대리석으로 만든 석방(石舫) 입니다


                  


유럽의 미궁(迷宮)을 본 따서 만든 것이 황화진입니다
사방에다 출입문을 만들고 가운 데에는 8방의 서양식 정자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남북 길이는 89m, 동서 길이는 약 59m입니다. 담장의 길이는 1,600여 m이고 담장 높이는 약 1.2m입니다
이곳 황화정은 훼손 되었던 것을 1987년에서 1989년까지 원래의 자리에서 복구해 놓은 것입니다

한 때는 음력 8월15일 중추절이 되면 이곳에 등을 달고 큰 파티를 열었다고도 전해 집니다


                 

 

서양루(西洋樓)는 청 건륭 12년(1747년)에 시작하여 건륭 14년(1749년)에 완성하였는데, 원명원의 동북 쪽에 있는 장춘원 북단에다 만들었습니다. 

백석(白石)으로 만든 건물의 뼈대와 일부 파편에서는 서양식 문양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건축물은 바로크 양식의 서양식이지만 지붕은 중국식의 유리기와를 얹어서 중국과 서양의 혼합형입니다

이곳 건축물들의 설계는 이태리의 선교사 카스틸리오네와 프랑스인 미셸 베로이스트가 한 것입니다

  

서양루는 목조건물이 아니어서 불타지 않은 돌기둥,주춧돌과 아취 문 등이 폐허 속에 남아 있습니다. 서양루의 같은 경관 구역에 있는 대수법(大水法)과 관수법(觀水法) 그리고 미로로 이루어진 황화진(黃花陳) 등은 원명원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원명원은 8개 연합국의 약탈과 방화로 지금은 뼈대만 남아 있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 버금가는 화려한 건물 안에는 온갖 보물들로 가득했다고 하는데 두 번의 칭략과 약탈로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약탈의 흔적을 지운다고 약탈자들은 원명원에 불을 질렀습니다 

재물 앞에서는 머리 속이 성한 놈이 하나도 없구먼 !  못난 놈들 같으니라구 !

                                    



요령성의 성도인 심양역 입니다


                           

서탑가(西塔街 시타지에)

심양시에는 원래 동서남북으로 동탑,북탑,남탑,서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탑은 남아 있지 않고 거리 이름만 서탑가로 남아 있는데, 이곳에 한국기업들이 많이 진출하면서 자연스레 한국상점들도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기 시작하여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었습니다. 밤이되면 강남의 이태원 못지 않게 휘황찬란한 네온싸인 아래 활기가 가득해 집니다. 요즘도 경기가 10여 년 전 처럼 좋은지 궁금합니다 ~


청태종에게 삼전도에서 인조는 아홉 번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三拜九叩頭 삼배구고두)는 항복을 합니다,

그러나 당시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던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인 윤집,홍익환,오달제가 심양까지 끌려와서 처형 당한 곳이 요령성의 성도인 심양시의 중산공원 안에 있습니다.

위치는 심양 남부역 맞은편의 민주로(民主路)와 중화로(中華路)의 심양시정부 앞 화평북가(和平北街)에서 남쪽의 화평남가(和平南街)가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온갖 회유에도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삼학사는 결국 1637년3월에 처형을 당했지만 청태종은 백성들에게 이 삼학사의 높은 절개를 기리고자 서문(西門) 밖에다가 사당도 지어주고 비도 세워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