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 진시황병마용박물관과 진시황릉(陵)의 기본 정보를 미리 알고 보아야 사진들 이해가 잘 됩니다
중국을 6국을 병합 통일하여 진(秦)나라를 세우고 나서 최초의 진(진)의 황제란 이름을 사용하여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되었습니다,
진시황은 13세 때(247년) 에 즉위 하였고,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등 세 차례의 동순(東巡) 중에 산동성에 와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37년 만에 병사하여 서안까지 오면서 아무에게도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감춘채 돌아 옵니다.
진시황릉은 서안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덜어진 여산(騹山)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아직은 발굴을 하지 않고 병마용에서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첨단 기술을 개발 할 때까지 발굴 작업을 미루고 있습니다.
즉 처음 병마용을 발굴 당시에는 얼굴과 갑옷 등이 모두 채색으로 나왔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금새 모두 지금과 같은 흙빛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시황릉의 묘지는 처음 조성랄 당시엔 100m의 낮은 산이었으나 2000년의 풍상에 지금은 47m로 낮아졌습니다.
아래 부분은 485mx 515m 이고, 릉의 내성(內城)은 둘레가2525m이고 외성(外城)은 6264m에 달하고 있는데
묘지면적만22만m2,총 릉원의 면적은 무려218만m2인데, 이 지하에 대규모의 궁전 누각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진시황릉은 이집트의 피라믿 보다도 규모가 훨씬 크다고 하며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역사서적에서는 진시황의 관은 동으로 만든 걸이에 올려져 있고 아래엔 수은을 흐르게 하여 접근을 방지하고 있고, 침입자가 있으면 화살이 발사되는 활도 있다고 했습니다.
제1진시황 병마용의 발굴은 1974년3월 가뭄을 견디려고 양지발(楊志發)이란 농부가 밭 가운데서 우물을 깊게 파내려 가다가 우연히 병마용의 머리를 발견하였고, 이 사실을 박물관 당국에 보고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은 현재까지는 3개의 갱을 발굴하여 ㅁ자 모양의 전시관을 대외개방 해서 전시를 해 오고 있습니다.
제1호갱은 1979년10월에 전시동을 지었고, 2호갱은 1976년에 발견하여 1994년에 전시동이 지어졌고, 제3호갱은 1989년에 전시동이 2호갱보다도 먼저 지어졌습니다.
이 박물관의 총면적은 2만 여m2인데 이 안에는 실제 사람이나 말의 크기와 대동소이한 도용(陶俑, 도자기로 빚은 것들)의 군인들과 말이 8천, 전차가 백 여 대 그리고 수 만 건의 병기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1호갱의 도용과 도마(陶馬)는 모두 6천 점으로 보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1jc 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보병과 차병(車兵)들입니다
전시되고 있는 청동의 병기들은 지하에서 2천 년이란 세월을 보냈음에도 그 예리함이나 섬광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호갱의 깊이는 약 5m이고, 길이는 230m, 폭은 62m에 면적이 14,260m2입니다.
2호갱은1호갱의 동북쪽 20m정도 가까이 떨어져 있습니다.동서 길이가 96m,남북 펵이 84m,건축면적은 17,016m2입ㄴ;디.
2호갱의 병사들은 보병,차병,기병과 활쏘는 사수들로 구성 배열되어 있는 혼합 부대입니다. 도용과 도마는 1,300여 점이 전차는 80여대 그리고 청동 병기가 만 여 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1호갱과 2호갱에서 유심히 보고 가야 할 사항은 병사들의 머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방향을 보면 한쪽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이 머리 스타일이 1호갱에서는 3가지 형태인데 2호갱에서는 7종이나 됩니다.
2호갱에서는 중급장군과 고급장군의 도용을 보는 것과 활쏘는 사수의 자세가 볼 만 합니다. 사수들은 입사(立射)와 궤사(跪射,무릎을 끓고 쏘는 자세)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3호갱은 2호갱의 서편에 위치 하며.1989년10월1일에 개방되었습니다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의 진시황릉박물원 입장시 맨 처음 만나는 입구의 문 입니다
외국인들의 입장은 박물관으로 직진하지 않고 상가들이 있는 옆 길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잘 조성된 오솔길을 걸어 갑니다
민들레의 군락지 입니다
꽃과 나무 사잇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제1갱의 전시청(청)에 이릅니다
병마용박물관은 항상 구경하려는 국내외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의 정문인 제1갱 전시청 앞 입니다
진시황제는 통일 전쟁 하느라고 백성들을 전장으로 내몰았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만히장성의 보수와 새로운 축성에 많은 인원들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루에 영원히 살 지하궁전을 짓는데도 11년간을 집중하여 72만 명이란 엄청난 인원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입장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영상실로 들어가서 360도 회전 스크린으로 만든 진시황릉에 관한 소개 영화를 먼저 봅니다
병마용 제1갱 전시실로 향해 담장을 끼고 돌아갑니다
진병마용1호갱 대청이란 현판을 보면서 안으로 입장 합니다
진(秦)나라의 글씨는 전서체(篆書體)와 예서체(隸書體)여서 서안에 오면 거리의 현판들도 예서체로 쓰여진 것이 눈에 많이 보입니다
갱 안의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는 광경은 전문 작가들의 사진으로 많이 소개가 되었고,
저는 그저 기념으로 다시 사진에 담았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어서 다소 여유가 있게 사진을 담았습니다
이 진 병마용들은 갱 안에 도열하고 있는데 이 모양은 발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병마용들의 크기는 사람들과 말의 실제 크기와 비슷합니다
병사들의 두발 스타일이 한 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시 특히 백병전을 벌일 떼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데 큰 도움이 된 전술이었다고 합니다
머리 스타일은 뒷 모습에서 더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1갱 전시실을 나오니 나무들이 마치 진나라 병마용들의 도열한 병사들처럼 보입니다 ㅋㅋ
진시황제릉문물진열청(秦始皇帝陵文物陳列廳) 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병마용 갱을 발굴 당시의 노천 작업장 전경 입니다
아래 사진들은 병마용의 병사들 헤어 스타일 입니다
처음 발굴 당시의 채색 흔적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차마 진열실은 지하로 내려가서 들어가서 보게 됩니다
여기 전시되는 사진 속의 마차 두 대는 실물이 아니고 고증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축소판의 모조품 입니다
처음 발굴팀이 이 청동의 마차를 발견시는 지하에서 2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무는 부식되 어 있었고 매달아 놓았던 마차가 땅에 떨어져 청동 마차의 형태가 몽땅 부숴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섬서성 서안(西安), 화산(華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서안 진시황릉의 동마차(銅車馬) (0) | 2014.05.11 |
---|---|
중국 서안의 진시황릉박물원,진시황병마용 박물관(2~2 (0) | 2014.05.09 |
중국 서안의 교자(餃子)전문점 진금당(秦錦堂)이라고 ? (0) | 2014.05.07 |
중국 서안 화청지와 서안사변(西安事變) (0) | 2014.05.05 |
중국 서안, 화청지와 양귀비 (0) | 2014.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