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전시회

중국 그림의 배경을 찾아서

콩지88 2017. 4. 16. 08:57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길을 가던 나그네가 동네 아이에게 이 부근에 酒家(주가 ,주막)이 어디 있냐고 묻자 아이가 손가락으로 (저기요 하고 )가리키는 글이  있는데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차문주가하처유? 목동요지행화촌)

(얘야) 말 좀 물어보자 주가(酒家 즉 주막)가 어디에 있지?

목동이 멀리 있는 행화촌을 (말없이 손으로) 가리켜 주네


이 그림은 바로 목동이 행화촌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 입니다


山西省의 汾陽市(분양시)에 있는 杏花村은 중국 명주로 꼽히는 竹葉靑酒(죽엽청주 주이에칭지오우)와 汾酒(분주 펀지오우)가 생산되는 곳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그래서 행화촌을 이야기 할 때는 으레 위 글귀를 인용하곤 합니다


판교(板橋)선생과 난득호도(難得糊塗)



"판교(板橋)"선생이 대나무 숲 앞에 앉아 있는 모습 입니다

정판교의 인물 소개와 유명한 난득호도(難得糊塗)에 관련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올려드립니다



정판교와 난득호도(難得糊塗)


  IMG_5062 호도난득 2.jpg

 

정판교는 이름이 섭(燮)이고 판교(板橋)는 호입니다.

강소성의 흥화(興化)사람으로 청나라의 건륭황제 때 진사(進士), 평소에 난죽(蘭竹)을 잘 그렸으며 서예는 아래의 사진에서 보듯이 글씨체가 예서,행서,해서(隸,行,楷)를 섞어서 쓰는 독특한 서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판교전집(板橋全集)이  있다.

강소성의 양주(揚州)는 양주팔괴(揚州八怪)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정판교를 양주팔괴(여덟가지 괴짜)의 우뜸으로 치고 있습니다. 섬서성 편에서 섬서십대괴(陝西十大怪) 중에서 몇 개를 소개한 바 있듯이 지방마다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난득호도(難得糊塗)는 우리나라 서예하시는 분들에게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한참동안 들여다보아도 얼른 제대로 해석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난(難)자도 어렵게 썼으며 아랫 줄의 난(難)자도 다르게 썼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글자들이 멋대로 마치 길 위에 돌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깔린 모양이어서 사람들은 난석포가체(亂石鋪街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판교 자신은 자신의 글씨가 해서체 보다는 예서체에 가깝지만 확실히 예서체도 아니고 해서체도 아니기에 6푼반서(六分半書, 일반적으로 예서체는 팔푼(八分)의 글씨라고 부름)라고 말을 합니다. 

  

호도(糊塗)란 멍청함,어리석음,분명치 않음,애매(모호)함 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난득호도란 글자에는 정판교의 강직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는 정판교 삶의 철학이 담긴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총명한 사람이란 정말) 멍청하게 살기도 어렵다”는 뜻으로 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멍청하다는 뜻 뒤에는 바로 총명이란 두 글자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총명한 사람이 혼탁한 사회에서 멍청하게 산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멍청한 사람은 자기가 멍청한 놈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멍충이니까 정판교가 말하는 멍청하다는 뜻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한 때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근무자세가 “복지부동형(伏地不動型)”이란 말로 국민들의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마지못해 하는 척 하고, 시키지 않는 일은 손을 까닥도 하지 않았으며, 솔선하여 일을 만들어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배아파하면서 아니꼽게 보기도 했습니다.

  

정판교는 난득호도의 글씨를 그의 나이 59세 때(1751년,건륭 16년)에 썼다고 합니다. 그가 유현이란 지방에 부임했을 때 백성들은 100년 만의 심한 가믐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대 그곳의 흠차대신 요요종(姚耀宗)은 백성들의 어려움은 나몰라 식이었고, 서화에 능하다는 정판교더러 서화 한 장 올리라고 하면서 사례금을 보냈습니다.

정판교는 이 흠차대신을 풍자하는 괴이한 그림을 그려서 보냈고, 이 괴이한 그림을 본 흠차대신은 대노하여 그 자리에서 그림을 찢어버리고는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지주들에게 양식을 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 정판교의 과실 책임을 더 무겁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정판교의 처자가 말하기를, “황제도 신경 안쓰고, 흠차대신도 못본척 하고 지내는데, 당신도 그냥 멍청하게 모른척하고 지내는 것이 좋겠어요...”

정판교가 이 말을 듣고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멍청한 척 하는 짓 나는 할 줄 모른다. 너희들이 어찌 알까보냐. 총명하게 사는 것도 어렵지만 멍청하게 사는 것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멍청하게 사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저 내버려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마음이 편안할 것을 나중에 복을 받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난득호도 큰 네 글자 아래에 작은 글자가 다소 어지럽게 쓰여 있습니다.

聰明難, 糊塗難, 由聰明轉入糊塗更難, 放一着,退一步,當下安心,非圖後來福報也

(총명난, 호도난, 유총명전입호도경난, 방일착,퇴일보,당하안심,비도후래복보야)

  

이 문장은 다음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즉 정판교가 유현지현으로 있는 동안 당제의 서찰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대대로 물려받은 가옥의 담장이 이웃과 송사에 걸렸으니 흥화현지현에게 청탁을 넣어 해결을 잘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판교는 회신 속에다 “...천리의 길에 편지를 보낸 것이 겨우 담장 하나 때문인가? 그에게 땅 몇 자 양보하면 또 어떤가...” 그리고 “難得糊塗”와 “吃虧是福(흘휴시복)”이란 글자를 첨언하였습니다. 

한 번 집착을 놓아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마음이 편안할지니 나중에 복을 받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정판교가 백성들의 고통을 눈으로 보면서도 어쩔 수 없어 멍청한 척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고통을 바로 이 “難得糊塗” 네 글자에다 담고 있습니다.

  

제가 산동성의 청도 옆에 있는 유방시(웨이팡 시,濰坊市)의 직업학교를 7년 전쯤인가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학교의 당서기와 학장 등과 저녁을 함께 하였습니다. 당서기란 분이 저에게 호도(糊塗)와 총명(聰明)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넌지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떨결에 ”糊塗比聰明更難行“(바보같이 사는 것이 총명하게 사는 것보다 더 어렵다)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다음 날 이 당서기와 학교측 인사들과 석별의 아침식사를 같이 하였고, 인사하는 자리에서 당서기가 족자 하나를 저에게 기념이라면서 선물로 주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 보니 바로 여기 올린 정판교의 “難得糊塗”의 탁본이었습니다.

제가 사진을 두 번 찍어서 혹시라도 잘 안 보일까봐 또 올렸으니 잘 감상하기 바랍니다.


IMG_5061 호도난득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