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성,정주,낙양,개봉

하남성, 낙양 용문석굴 4 주요 석굴 설명글

콩지88 2015. 5. 9. 11:04

 

 

 

 

 

 

 

 

 

 

 

 

 

 

 

 

 

 

 

 

 

 

 

 

 

 

 

 

 

사람들이 향산사(香山寺)로 오르는 계단을 밟습니다

 

 

저는 인파에 떠밀려다니다가 다소 지쳐서 아래에서 향산사를 올려다만 봤습니다

오후엔 소림사로 가서 탑림과 함께 구경해야하니 힘의 안배가 필요 합니다. ㅎㅎㅎ

 

 

 

 

 

 

 

백원(白園)에 들어가면 당 시인 백거이가 말년에 이곳에서 지내다가 묻힌 묘도 있고 관련 시비들도 있습니다

 

하남성, 낙양 용문석굴

간경사(看經寺)는 용문 동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용문 서산의 석굴들 보기에도 사람들에 밀려 지쳤기에 저는 동산 석굴을 보러 다시 많은 계단을 오르기는 미리 포기 했습니다.

향산사(香山寺)와 백거이(白居易) 묘 구경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ㅠㅠ

낙양(洛陽)은 중국의 중원으로 불려지는 면적 16만 km2인 하남성의 서부에 위치한 중국 7대 고도(古都)의 하나인데 하(夏)대에 도시가 형성되었으므로 7대 고도 중에서도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낙양은 예전에는 예주(豫州)라고 했는데 하납성의 차량들 범호팡에 豫(예)가 쓰여 있음은 예가 바로 하남성의 약칭이기 때문입니다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와는 서쪽으로 130km 떨어져 있는데 중국 역사문화의 도시입니다. 따라서 볼거리가 많은 곳임에도 패키지 여행에서는 많은 시간을 낙양에 할애하지 않아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낙양의 볼거리로는 첫째가 용문석굴, 그리고 백마사(白馬寺), 향산사(香山寺)와 당 시인 백거이(白居易) 묘, 관림(關林,관우의 사당) 낙양 고묘(古墓)박물관,낙양박물관, 매년 4월 말이면 열리는 목단 축제의 장소인 왕성(王性)공원 등이 있으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4자 성어인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가 있는 마을이 왕옥산(王屋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왕옥산(王屋山) 주봉에는 단(壇)이 만들어져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에 헌원(軒轅)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낙양의 특산물로는 중국 명주에 드는 두강주(杜康酒)가 있으며, 당삼채(唐三彩)와 상(商)대의 청동기 모사품, 궁등(宮燈), 목단그림 등이 있습니다

낙양은 9개의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4개 왕조가 추가되어 13개 왕조가 자리 잡았던 곳이라고 일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9개 왕조란 東周,東漢,曺魏,西晉,北魏,隋,唐,後梁,後唐 (동주,동한,조위,서진,북위,수,당,후량,후당 )을 말하며, 추가 4개 왕조란 夏,商,西周,後晉(하,상,서주,후진)을 말합니다

용문석굴(용문석굴)은 낙양 시내에서 서쪽으로 13km 덜어져 있으며, 이수(이수)를 가운데 두고 서편의 용문산과 동편의 향산에다 석굴과 불감을 조성해 놓은 중국 3대 석굴(산서성 대동의 운강석굴,감숙성 돈황의 막고굴 그리고 용문석굴))의 하나입니다.

용문(龍門)이란 이름은 중국에서는 황제나 제왕을 일컫는데 많은 제왕들이 이곳에 와서 향을 피우고 배불(拜佛)을 하느라고 오갔느데 즉 용들의 출입이 많았으니 그 출입문이 바로 용문(龍門)인 것입니다.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서기 493년 전후에 낙양으로 천도하여 용문산과 향산에 마치 벌집과 같이 보이는 많은 석굴과 불감(佛龕)을 만들기 시작하기를 만당(晩唐) 시기 까지 400여 년에 걸쳐 대역사를에 착수 하였습니다

용문석굴 요령으로 살펴 보기

오늘날의 용문석굴에는 굴감이 2100여 개, 불탑이 39개 그리고 만들어진 조상(造像)이 10만 여 존(尊)입니다. 물론 오랜 세월과 전란 속에 파손,훼손 된 것도 적지 않습니다만 이 많은 석굴과 불감들을 구경하려면 구경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금새 피곤해지고 방금 본 것들 조차도 먼저 본 것과 구분이 잘 가지 않게 됩니다

처음엔 욕심내어 열심히 보면서 걷다가 곧 이젠 고만보고 가사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보기 보다는 용문석굴의 특성 몇 가지를 미리 확인하고 골라서 보는 것이 어쩌면 일반 중생들에겐 더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몇 가지만 소개 합니다

북위시대와 당나라 때 만든 것의 차이가 몸매에 보입니다.

북위 시대에 만든 것은 얼굴과 몸이 좀 날씬(?)한 데 비하여 당나라 때 만든 것은 다소 풍만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북위시대의 대표적 석굴과 불감은 고양동(古陽洞), 빈양동(賓陽洞), 연화동(蓮花洞), 약방동(藥方洞)이 있으며

당나라의 대표적이 것으로는 잠계사(潛溪寺), 만불동(萬佛洞),봉선사(奉先寺), 그리고 동편 향산의 간경사(看經寺) 등이 있습니다

잠계산(潛溪寺)

용문석굴 서산 북단의 쿤 석굴로서 높이 9.3m, 폭 9.5m, 깊이6.65m인데 안에는 아미타불 불상, 두 제가 그리고 두 보살과 두 천왕이 있습니다. 굴 아래에 물이 흐르고 있다하여 잠계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 석굴은 용문을 통과하여 제일 먼저 만나게 되므로 누구든 빠트리지 않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얼굴 부분이 다소 풍만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북위시대의 약간 마른 조상들을 확인해서 보면 용문석굴 감상에 도움이 되겠지요?

빈양동(賓陽洞)

서산의 북부에다가 북위시대인 서기 500년에 착수하여 523년 24년에 걸쳐 완공한 남,중,북 세 개의 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남동과 북동은 북위시대에 착수하였으나 완공은 당나라 때 이루어 진 것입니다

연화동(蓮花洞)

용산 서산에다 북위 말기인 527년 전후에 만들어 직입니다.

연화동이란 이름은 천장에 큰 연화가 새겨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깊이가 9.6m, 폭 6.15m 그리고 높이는 6.1m입니다

굴 안에 높이 5.1m의 석가모니 입상이 있는데 얼굴과 두 손이 훼손되어 있지만 두 팔을 앞으로 향해 내밀고 있는 것과 오른 쪽의 가섭이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모양으로 미루어 “석가걸식상(釋迦乞食像)”이라고 짐작하게 합니다.

약방동(藥方洞)

북위 말기에 시작아혀 만당의 측천무후 시대에 완공한 서산 북쪽에 만든 석굴입니다.

동굴 양 편에 140여 종의 병에 대한 처방을 내린 약방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석굴 안의 주불과 제, 보살 그리고 역사의 조각상은 북제 때 만든 것들입니다

만불동(萬佛洞)

당나라 때인 서기 680년에 서산의 남북 양 벽에 조성한 석굴입니다

층층 겹겹으로 조각된 불상들은 크기가 4cm정도로 작은 것들인데 무려 1만5천 개나 새겨져 있으니 만불동이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이 8각의 연화 좌대에 단정하게 앉아 있고 뒤로는 52개의 연화 가지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연화 가지마다 보살이나 공양하는 사람이 하나씩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남북의 벽 아래엔 기악인(기악인)들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음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고양동(古陽洞)

용문석굴 중에서 서기 493년 전후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석굴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북위의 용문 20품(品) 중에서 19품이 바로 이 고양동 안에 있습니다. 서예에 관심 있는 분은 빠트리지 말고 보시기 바랍니다. 중국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봉선사(奉先寺)

용문석굴의 감상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봉선사입니다.

불감의 동서 길이가 41m 남북 폭이 36m 그리고 주불의 높이는 17.14m로 용문석굴 중에서 가장 크며, 석굴 또한 노천 불감(佛龕)입니다. 당나라 조소(雕塑) 예술의 대표 걸작입니다

이 불상의 수려한 얼굴에 약간 아래로 깐듯한 눈매며, 멀리 바라보는 눈 빛은 보는 이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겨 줍니다.

주불 옆의 근엄한 모습의 가섭과 온순함이 엿보이는 아난, 단정한 보살 그리고 천왕의 노한 눈과 강건하게 보이는 역사 이 모두 신의 경지에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측천무후는 자기의 지분 살 돈 만 관(貫)을 이 봉선사 만드는데 공양으로 바쳤다고 하며, 또한 개광식(開光式) 때 직접 참석을 했다고 합니다. 이하(伊河) 강의 맞은 편 향산에 격고석(擊鼓石)이란 큰 바위가 있는데 개광식 날 격고를 울리는 큰 소리가 사방에 울려 펴졌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