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성

소읗시의 노신기념관, 소흥주, 왕희지

콩지88 2015. 1. 16. 15:08

 

 

 

 

 

소흥시도 물이 많은 수향(水鄕)의 도시 입니다

 

 

 

노신(노신 루쉰)의 사진 입니다

 

 

노신공원의 패말 입니다

 

 

노신공원의 입구 입니다

 

 

노신공원의 소개 글 입니다

 

 

 

노신이 살던 동네의 집에는 노신고리(魯迅故里)라고 써 놓고 옛 거리의 그림도 그려 놓았습니다

 

 

 

 

노신의 좌상 입니다

 

 

서재 입니다

 

 

황주(黃酒)를 담은 술단지들입니다

 

 

소흥은 옛 부터 황주(黃酒)인 소흥주(紹興酒)로 아주 유명 합니다

술의 도수는 일반 백주(白酒 빠이지우) 보다는 많이 약하며 우리나라 청주 정도인데

색갈이 황색이며 향은 독특한 누룩의 냄새를 가지고 있어서 처믐엔 약간 거부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한 번 황주의 맛에 익숙해지면 아주 즐겨 마실 수 있습니다

대만에선 일반 연회 자리나 결혼식 피로연에 잘 올라오는 술입니다

 

전헤 오는 뻥 같은 이야기 하나를 남깁니다

일반적인 소흥주는 그냥 소흥주라고 써 놓았지만 좀 더 오래 묵힌 것은 진년(陳年) 두 글자가 소흥주 앞에 쓰여져 있습니다.  진년은 여러 해가 묵었다는 뜻입니다.

좀 더 오래 묵은 것은 그냥 화조주(花凋酒)라고 써 놓았습니다

 

말인즉 딸을 낳으면 그 때 술을 담았다가

그 딸 시집 가는 날 그 술을 꺼낸다는 것인데, 처녀 나이가 자꾸 차게 되면 진(陳)짜가 붙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노처녀의 경우에는 꽃이 시들었다는 화조(花凋) 두 글자가 있는 화조주(화띠이아오)라는 것입니다, ㅋㅋㅋ

 

 

 

공을기 단편소설의 무대이던 함형주점(咸亨店점) 입니다

 

 

함형주점은 그 이름이 유명해지고 보니 남경 진회하(秦淮河)에도 있고 상해 외탄(外灘) 가까이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서울 청계천 입구 부근에 공을기 중화식당이 몇 년 전에 개업을 시작하였는데 저는 아직 가 보지는 않았습니

 

 

다. 만약 들릴 기회가 나면 공을기의 상호를 붙인 내력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공을기가 술 한 잔에 즐겨 먹던 회향(茴香豆)두 입니다

 

 

사진은 마치 백주를 마시는 것 같습니다

황주는 좀 더 큰 술병에다 담으며, 마시기 전에 좀 데워서 가져오라고 주문 하기도 합니다

저도 황주는 청주 데우듯이 약간 데워서 마시기를 좋아 합니다

 

 

아Q정전 주인공 아Q의 얼굴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신의 작품들은 거의 다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상해의 홍구공원이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패키지 여행으로는 이런 공원 한가하게(?)구경하기가 시간적으로 어렵지요

 

 

노신공원 입구와 가까이 있는 매헌당의 모습입니다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가 일본 천장절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원인데 십 여 년

 

 전에 홍구공원에서 로신공원으로 그 이름이 바쒸었습니다.

 

윤봉길 선생 기념관인 매헌당과 100m 정도 거리에 로신기념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많이 찾고, 매헌기념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입니다

 

 

 

 

중국 근대화 시절에는 로신(魯迅 루쉰)이 청년기의 작품들을 집필 하였는데, 그의 유명작품으로는 광인일기(狂人日記

 

 

 1918년 “신청년”에 발표한 첫 작품). 아큐정전(阿Q正傳 1921년 발표한 작품), 공을기(孔乙己 쿵이지), 고향(故鄕) 등이

 

 있는데 공을기에 나오는 주인공 공을기가 자주 들리던 함형주점(咸亨酒店)은 개업후 2년만에 영업이 잘 안되어 문을

 

 닫았다가 1980년대에 다시 그 자리(지금은 소흥시 노신로)에서 영업을 하는데 지금은 소흥시의 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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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흥은 노신이 어려서 백초원(百草園, 고거 뒤편에 있음), 삼미서옥(三味書屋)에서 공부하면서 살았던 곳(魯迅故里, 魯

 

 

迅故居)을 포함한 노신기념관이 있고, 상해엔 로신공원 안에 로신기념관이 있는데, 상해 외에도 광동성의 중산대학 안

 

 

에 그리고 산동성 청도(靑島)에도 노신기념관이 있으니 어디서든 기회가 나면 잠깐 들여다 보아도 좋겠습니다. 중극 근

 

 

대화 과정의 당시 중국 사회 상황과 선각자와 지식층들 사상의 흐름과 방향, 철학 등의 흔적들을 엿 볼 수 있습니다

 

 

1902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다니던 학교에서 1906년에 의학공부를 중퇴하고 1909년 귀국하여 중국인의 무지와 게으른

 

 

 국민성을 개조하며 계몽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고 작품을 냈습니다.

 

 

 

 

모택동은 노신에 대하여 “위대한 문학가일 뿐 아니라 사상가이자 혁명가”라고 극찬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대만에서는 노신의 그 어떤 작품도 모두 금서로 지정하고 1990년대 말까지 시중에서 노신의 이름조차 절대로 볼

 

 

 수 없게 했습니다

 

 

 

서예하는 분들에게 널리 알려진 왕희지는 아지(鵝池)라는 정자가 있는 연못에 와서 글짓기를 한 것(蘭亭集序 란정집서)

 

을 계기로 매년 봄에 국제서화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다시 소흥시를 소개하면,

소흥시는 절강성의 역사문회의 도시인데, 광역인구는 433만 명이 넘으며 시구의 인구만은 60망 명 정도입니다. 위치는

 

 항주와 80km, 영파(寧波 닝뽀)와는 100km, 상해와도 100km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