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충칭(重慶) 이야기 요약

콩지88 2020. 7. 20. 08:58

이 사진은 충칭과 가까이 있는 무릉 천생교(武陵 天生橋) 입니다

충칭에 관하여 요약하여 사진을 달지 않고 소개해 드립니다

 

충칭(重慶)이란 말은 두 가지의 경사가 겹쳤다고 해서 생겨 난 이름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송나라 때 세자 조둔(둔 짜오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경사와 이 도시의 황태자란 이름을 얻은 경사 즉 두 가지 경사를 겹쳐서 가지게 되어 도시 이름도 옛 공주(恭州 꿍저우)에서 충칭으로 바꾼 것 입니다

 

충칭에 가면 날씨와 관련한 아래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1) “空山不見人, 但聞人語聲(공산불견인, 단문인어성)” 즉 안개가 워낙 짙게 끼어서 사람의 말소리는 들리는데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네라는 뜻입니다.

충칭은 일 년 중에 안개 끼는 날이 100~150일 정도가 될 정도여서 안개의 도시 즉 무도(霧都)라고도 불려 집니다

 

2) 무한(武漢) 남경(南京)과 함께 중국 3火爐(화로) 즉 찜통의 도시이기도 한데 여름철 뿐만 아니라 새벽에도 해만 뜨는 날이면 섭씨 40도가 넘게 기온이 오릅니다. 여름 철에 더위 먹고 사망하는 노인네들이 생겨나는 이유입니다

 

3) 충칭의 개들은 해가 뜨면 해를 보고 짖어댄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충칭에서 해 뜨는 맑은 날 보기가 어렵다는 간접 화법입니다. 모처럼 해가 뜨니 개들이 놀래서 하늘의 해를 보고 한 마리가 짖어대니 주위의 모든 개들이 따라서 해를 향해서 함께 시끄럽게 짖어댄다는 이야기입니다

 

4) 충칭의 장강과 가릉강엔 옛 날에는 두 케이블 카가 운행되었는데, 관광용 보다는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지금은 교통 수단도 늘어났고, 심지어는 고층 아파트의 아래 층을 모노레일이 지나가는 광경도 볼 수 있어서 관광객들이 호기심으로 몰려들고 사진을 기념으로 담아가기도 합니다

 

5) 충칭은 사천성과 함께 한국 충청도의 백김치 같은 파오차이(泡菜 포채)라는 김치를 옹기에 담아서 만든 사천식 김치를 즐겨 먹습니다. 다만 고춧가루나 고추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마늘과 파를 주로 사용해서 담습니다

 

6) 중국의 4대 요리의 하나로 꼽히는 충칭,사천성은 사천요리의 본 고장입니다. 매운 麻辣火鍋(마라 훠꾸어) 외에 쇠고기 국수(牛肉麵)와 딴딴메엔(擔擔麵)을 맛 보는 것은 충칭,사천성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산동성의 만터우(饅頭 만두는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찐 것)와 비슷하지만 모양이 둥글지 않고 길쭉한 빵으로 銀絲捲(은사권 인쓰쥐안)이 있으며, 그냥 찐() 것과 기름에 튀겨 낸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연유(煉乳)에 찍어 먹으면 맛이 더 있습니다 ~

 

7) 충칭의 최초의 이름은 빠()의 땅이었고, 사천성은 삼국지에서는 촉()의 땅이어었습니다. 충칭이 포함된 사천성을 파촉(巴蜀)의 땅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다시 파와 촉이 분리된 양상이 되었습니다.

 

파촉의 땅은 삼국지의 이야기도 많이 남겨 놓았지만 중국 4대 미인의 한 명인 왕소군(王昭君 왕자오쥔)도 사청성 출신입니다.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시집 간 것을 가엽게 여긴 후세의 시인이 읊은 시귀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곧잘 인용하기도 합니다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

오랑캐 땅에는 화초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봅 같지가 않구나 ~

(왕소군의 묘는 내몽골의 수도인 호화호특 (呼和好特 후허하오터)에 있는데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면서 들려 볼 수 있습니다 묘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의 봉우리 같습니다. 저는 199512월말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당시는 무척이나 황량했습니만, 지금은 정리가 잘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충칭의 케이블 카(索道)

두 개가 있는데 모두 탑승장이 해방비(解放碑) 가까이에 있습니다. 해방비의 북쪽에 있는 것은 가릉강색도(嘉陵江索道)이고 남쪽에 있는 것은 장강색도(長江索道)입니다. 예전에는 강을 건너가는 서민들의 교통수단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충칭에서 이 케이블카를 타고 주변을 둘러 보는 것도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해방비(解放碑)

1945년 중일전쟁이 일본의 패망으로 중국 측이 승리를 거두자 세운 기념비입니다. 1950년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경인민해방비로 이름이 바뀐 높이 27m의 기념비입니다. 주위가 상가,은행,식당,서점,숙박시설 등이 밀집되어 있고, 충칭에 머무는 동안 한 번 이상은 지나가게 되는 곳입니다

 

나한사(羅漢寺)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지만 문화대혁명 당시에 대부분이 파괴되었는데, 지금의 사찰은 1984년에 중건한 것입니다. 해방비에서 민족로를 따라 10여 분 걸으면 까르푸 매장을 지나 곧 만나게 됩니다

 

홍암촌혁명기념관(紅岩村革命紀念館)

중일전쟁 당시 중국 공산군의 남부지역사령부가 있던 곳이며, 해방 후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역사적인 쌍십협정(雙十協定)이 이루어진 장소입니다

홍암의 붉은 네모진 건물이 특이하게 보이며, 기념관을 오르는 많은 계단이 특이하게 설계되어 사진에 남기면 추억이 만들어 집니다 ~

 

국민당의 장개석과 공산당의 모택동은 이 홍암촌에서 45일 동안 마라톤 식 평화협상을 하여 드디어 통일중국을 위한 서명을 하기에 이릅니다.

홍암혁명기념관에는 중일 전쟁과 중국 공산당이 충칭에서 베푼 좋은 일들과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가 잘못한 일들을 3개 층의 6개 전시실에서 전시해놓고 있습니다.

중국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항일투쟁에 서로 내전까지 했던 역사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명 후 일 년 만에 국민당 장개석은 이 서명이 공산당의 전술에 불과하다는 속 사정을 간파하고는 전국적으로 공산당군에 대하여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서안에서 장학량의 젊은 장군의 권총 앞에서 몇 가지 조건의 내용에 서명이 이루어졌으나 장개석은 대륙을 철수하여 대만으로 갈 때 장학량을 체포하여 그가 100세를 넘겨 죽는 날까지 단 한 번 미국 여행을 허락한 것 외에는 계속하여 연금을 했습니다. 그는 대만에서 죽는 날까지 서안사건에 대한 그의 진정한 의도가 과연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는 끝내 입을 다물고 무덤까지 가져가고 말았습니다

 

중미합작소(中美合作所)1937년 설립된 미국과 중국의 합동 정보교육기관인데, 중일전쟁 당시 작전사령부와 특수부대 양성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원들을 색출하는 기관으로 이용하면서 악명이 높았는데 지금의 미국-장개석전쟁범죄전시실은 공산당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살펴 볼 가치는 있는 곳 입니다

 

충칭 여행에서 시간이 된다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대족석굴(大足石窟)은 빠트리지 말고 구경하고 오시라고 추천해 드립니다  청두(成都)에서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대족까지 왕복 하는데는 꼬박 하루가 소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