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보는 북경~(81) 경산(景山)공원 둘러보기
자금성의 어화원(御花園)을 떠나기 전에 머리를 들어 올려다 본 경산공원의 만춘정(萬春亭)입니다
만춘정의 오른 쪽 정자가 보이고,
만춘정의 왼 쪽 정자가 보입니다
고궁(박물원)의 북문인 신무문을 나섭니다
자금성의 주위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담장 아래엔 폭 52m의 호성하(護城河)가 흐르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해자(垓子)라고 부릅니다.
북쪽에 있는 산은 만세산(萬歲山)이었으나 청대에 경산(景山)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은 경산공원이 되어 있습니다
한편 청나라 때는 민가 건축시 태화전의 높이를 절대로 초과해선 안된다는 기준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경산은 해발 약 68m의 높이를 가지고도 북경 시내에선 가장 높은 산으로(?) 돋보였으며, 지금도 고궁주변과 북해공원 주변에선 경화도(璟華島, 또는 璟島) 위의 높이 35.9m의 백탑(白塔)과 함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 ㅎㅎㅎ
경산공원의 입구 입니다
자금성의 네 모서리에는 3층의 수려한 각루(角樓)가 동서남북 네 곳에 각각 세워져 있습니다.
경산공원의 정상에 위치한 만춘정까지 거리는 330m이고,
명 마지막 황제 숭정(崇貞)이 목매고 죽은 홰나무(괴木)는 240m 입니다
저는 우선 만춘정으로 올랐습니다
청 건륭 15년(1750년)에는 이 경산 제일 높은 곳에 지은 만춘정(萬春亭) 등 5개의 유리정자를 지었습니다. 이 만춘정(해발 68m의 높이 17.4m)에 오르면 자금성 전체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며.주변의 시내 풍광도 잘 보입니다.
오정(五亭)은 만춘정과 동쪽의 관묘와 주상(觀妙亭, 周賞亭), 서편의 집방과 부람(輯芳亭,富覽亭) 다섯 개의 정자를 말합니다. 이 오정의 안에는 원래 오미신(五味神)이라는 다섯 존(尊)의 동(銅)불상이 하나씩 있었으나 1900년 연합8군의 북경 진입시 4개의 동불상을 약탈 당했고, 너무 크고 무거워서 가져가지 못했던 만춘정의 비로사나불상은 크게 훼손당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오정의 약탈 당한 불상들 자리엔 받침 석좌(石座)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고궁(자금성)은 북경의 중심점입니다
네모 안이 자금성이고 서쪽에는 부성문,서직문(西直門) 등이 보이고 정양문이 맨 아래(남쪽)에 있고
동쪽엔 동직문(東直門)이 보입니다
이곳 경산에는 많은 국내외 사진 촬영 애호가들이 지금도 자금성 전경을 가장 멋지게 담아내려고 즐겨 찾는 명소입니다.
만춘정에서 내려다 본 백탑(白塔)입니다
이 탑에서 서쪽으로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가면 경화도의 방선반장(傍膳飯庄)이란 청대 황실의 레스트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북해공원 소개시 사진도 함께 올려드리겠습니다
만춘정에 올라서 한 바퀴 돌면서 사방을 둘러 봤습니다
수황전(壽皇殿) 입니다
수황전(壽皇殿)은 경산공원의 뒤 편에 있으며, 청 건륭 때 태묘(太廟)를 모방하여 지은 것인데, 옹정황제 때부터 황실의 어용(御容,초상화)들을 모아서 모셔 둔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북경소년궁(北京少年宮)이란 이름으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정자의 천정이 화려합니다
고궁은 밤에는 조명은 하지 않으므로 고궁(자금성)의 야경 촬영은
저 같은 카메라 초보자에겐 별 의미가 없겠습니다 ㅠㅠ
관묘정(觀妙亭) 입니다
주상정(周賞亭) 입니다
아래로 내려 왔습니다
이 길 옆에 숭정이 목매달았던 홰나무 자리가 있습니다
날이 많이 어두워서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래에 설명문이 있습니다
경산공원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崇禎)이 홰나무에 목매어 자결(1644년)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만춘정에 오르기 전에 계단 옆에 괴수(槐樹)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원래의 홰나무는 문화혁명 때 사구(四舊, 즉 舊思想,舊文化,舊風俗,舊習慣은 타파되야 한다는 것)에 해당되어 문화혁명 때에 베어졌고, 지금 볼 수 있는 홰나무는 1981년에 새로 심은 것입니다.
일설에는 이 원래의 홰나무가 황제의 목숨을 지키지 못했다하여 죄를 물어서 쇄사슬에 칭칭 묶어놓고 있었는데, 연합 8군의 침입 때 이 쇄사슬 역시 약탈 당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홰나무는 제가 1995년부터 북경에서 지내면서 경산공원을 찾을 때마다 보곤 했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키가 엄청나게 커서 처음엔 못 알아봤습니다. 나무 앞의 설명 표지판을 보고서야 확인을 했던 새로 심은 홰나무였습니다.
배낭을 멘 두 청년이 회나무에 관한 글을 읽어보고 있습니다
공원 입구의 맞은 편 고궁박물원의 신무문(神武門)에는 벌써 불이 켜졌습니다
이자성(李自成)은 누구인가?
봉건군주 타파를 위해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 위주로 일어난 기의군(起義軍)의 지도자로 이자성이 나서자 크게 싸우지 않고서도 북경 성 밖에서는 명군(明軍)들이 앞을 다투어 환영하면서 투항하였고, 북경 진입을 하자 부성문(阜成門)과 서편문(西便門)을 지키던 명군이 이자성의 의병들을 환영하면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명말 휘종 때인 1627년 섬서 지방에 대기근이 일자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관가를 습격하면서 농민을 중심으로 한 기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홍수와 가믐 그리고 메뚜기 떼의 극성은 농민군이 각지에서 일어나는데 계기가 되었습니다. 1640년에는 농민출신 이자성이 가장 걸출한 기의군의 지도자로 부상하였습니다.
당시 만주 쪽에서는 여진족(지금은 만주족으로 통합되어 있음)이 대청(大淸)이란 이름을 내걸고 세력을 넗히고 있었고,이자성은 1644년 정월에 서안(西安)에서 건국하여 국호를 대순(大順)이라고 했고,그해 3월17일에는 북경에 진격을 했습니다
3월19일 숭정이 경산에서 홰나무에 목을 매고 죽자 명나라는 막을 내립니다.
모택동은 생전에 이자성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산당 조직시 농민출신인 이자성을 통해서 무산계급의 승리를 보면서 모택동은 머리 속에 대장정(大長征)의 계확을 이미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