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을 모신 무후사(武侯祀)와 출사표
제갈량과 무후사(武侯祠) (섬서성 한중,사천성 성도)
제갈량의 묘(墓)
제갈량의 묘는 섬서성 한중시(漢中市)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면현(勉縣) 남쪽으로 1km 거리인 정군산(定軍山) 아래에 있습니다. 묘묘(墓廟) 건축물은 명대, 청대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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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임종을 앞두고 정군산 아래에 묻어 줄 것과 장례는 검소하게 하고 거창하게 치루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제갈량이 검소하고 절약하기를 솔선수범한 생활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武侯祠)
섬서성의 무후사(武侯祠)는 면현(勉縣) 신성(新城)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져 있는데 천섬공로(川陝公路, 사천성과 섬서성을 있는 공로) 남측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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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사와 묘는 약 5km 떨어져 있습니다.
무후사는 남북 길이 약 200m, 동서 길이 약 120m이며, 7개의 원과 5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패방(牌坊), 종루(鐘樓), 고루(鼓樓), 대전(大殿) 등의 건축물들이 있습니다. 대전 안에는 머리에 윤건(윤巾)을 두르고 우모(羽毛)의 부채를 든 제갈량의 소상(塑像)이 있습니다.
(윤자는 倫자에서 人변이 아닌 糸변입니다)
사천성 성도(成都)의 무후사만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기에 제갈량의 묘(墓)와 약 5km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는 섬서성의 무후사도 여기서 먼저 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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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사(武侯祀)의 현판을 보면서 무후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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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우주(名垂宇宙)란 현판도 보입니다. 제갈량의 이름은 이 세상천하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리라는 뜻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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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깃털의 부채를 들고 있는 제갈량의 좌상입니다. 머리 위에는 정원당(靜遠堂)이란 세 글자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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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있는 제갈량의 머리 뒤에 걸려 있는 정원당이란 현판입니다
중경과 사천성의 땅을 천부(天府)의 물자가 풍성한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인구는 중경과 사천성을 합하면 1억 2천만 명이 넘습니다. 지금의 중경직할시 땅은 파국(巴國)의 땅이었고, 사천성은 촉국(蜀國)의 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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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가 현덕인 유비는 지금의 하북성 탁주(涿州 ,북경에서 남쪽으로 40km정도 거리) 입니다. 221년에 이곳 성도에서 나라를 세우고 蜀이라고 하였는데 후세인들은 촉한(蜀漢)이라고 부릅니다. 223년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패하고는 병이 들어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백제성(白帝城,중경직할시에 속한 奉節)에서 죽었습니다.
이 유비의 소상은 청 강희제 때인 672년에 만든 것입니다
아래의 소상들은 삼국지의 용맹을 떨치던 촉한의 장수들입니다. 이 무후사에는 이런 초상들이 ㄷ자 모양의 회랑 벽에 서로 마주보며 일렬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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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충(馬忠)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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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익장을 과하곤 했던 황충(黃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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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馬超)의 소상(塑像)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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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자룡(子龍)인 조운(趙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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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익덕(益德)인 장비(張飛)는 유비,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중에 막내입니다. 큰 눈을 잘 때도 감지않고 뜨고 있었다고도 알려지는 장비는 고깃간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성질 급하고 무식한 술고래로 오해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비의 고향인 북경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탁주 지방에 가보면 장비는 얼굴도 미남형에 시가에도 능한 사람이었다고 말들을 합니다.
출사표(出師表)
아래의 사진들은 양 벽면에 있는 전출사표와 후출사표의 내용을 사진에 담은 것입니다. 각각 앞 뒤 부분만 찍었고 가운데 부분은 빠졌습니다.
악비(岳飛)의 글씨체가 워낙 힘차고 충정심이 보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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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출사표의 앞 부분입니다
출사표(出師表)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올린 글입니다.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후 천하의 형세를 분석하고 익주(益州)가 처한 상황은 매우 위급하여 존망의 기로에 서있음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는 역사의 교훈을 예로 들며 설명했습니다. 재덕을 겸비한 문무백관들을 유선에게 추천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공정한 논공행상을 펼 것과 법을 어기고 기강을 어지럽히는 간신배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충정어린 심정을 표했습니다.
그가 강조한 구절을 소개해 보면,
현신(賢臣)을 가까이하고 소인들을 멀리하였음은 선한(先漢)이 흥성했던 원인이었으며,
소인들을 가까이하고 현신을 멀리하였음은 후한(後漢)이 쇠망한 근원이었으니..
“親賢臣,遠小人,是先漢興隆的原因; 親小人,遠賢臣,是後漢衰敗的根源...”
“친현신,원소인,시선한흥융적원인; 친소인,원현신,시후한쇄패적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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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출사표의 시작입니다
악비(岳飛)가 제갈량의 이 글을 읽고는 매우 큰 감동을 받아 나라에 충성하고 잃어버린 산하(山河)를 되찾는데 목숨을 바치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단숨에 출사표를 써내려갔다고 합니다. 이곳을 찾는 분들은 악비의 충정까지 담긴 이 출사표를 다시 한 번 더 보는 여유를 가져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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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자가 날 日 대신 눈 目자가 들어 있으니 한 번 더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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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181~234년)은 자는 공명(孔明)이며 산동성의 기수(沂水) 출신입니다. 그는 생전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정치가이며 군사 전략가였습니다.
지금의 무후사는 청나라 강희황제(1672년) 때 3.7만m2의 부지에다 중건한 것입니다. 사당의 오랜 백송들이 가득한 가운데 웅장하고 위엄을 갖춘 전(殿)이 방문객을 엄숙한 분위기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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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는 있는데 향은 피우고 있지 않았습니다.
향로가 있는 곳은 항상 무더기로 곶은 타고 있는 향들과 자욱한 연기로 중국 분위기를 잡곤 했는데 여기는 엄숙과 고요가 사방에 흐르고 있습니다
삼국지연의는 삼국지정사와는 나관중 작가의 각색에 따라 보는 관점에 차이가 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정사와 큰 거리 없이 표현의 과장은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런 부분은 읽는 이들에게 흥미를 돋우는 차원이기 때문에 책을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보게 됩니다. 촉한의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조조나 손권 그리고 사마의나 주유의 참 모습과 실력이 다소 낮추어져 평가가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조처럼 다소 간사한 얄팍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기본 상식을 가지고 이 무후사를 찾는다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인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교과서처럼 읽히는 삼국지연의는 재미가 있고, 내용 중에 군사전략, 인사관리, 인맥활용, 권모술수, 계략, 미인계, 의리와 신의, 불신과 모략, 충성심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누구나 한 번 보고 다시 보고 나이 들어서 다시 보게되는 명작입니다.
이 글과 사진은 2010.4.24일 올렸던 것인데 다시 한 번 더 올린 것은 제가 올린 것도 찾아 내는데 무척 힘이 들었기에 여러분께는 찾는 어려움을 덜어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greatwal88&folder=20&list_id=11520812&page=1
도움을 드리려고 했는데 조인스 블로그가 폐쇄되면서 사진들마저 다 사라져 배꼽만 나왔습니다
시간 나면 원본을 찾아서 보완하겠으니 양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