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제국을 가다 25-1 여진족이 세운 청 ``1
여진(女眞)족이 세운 청(淸) 제국
누루하치(奴爾哈赤)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성을 가진 건주죄위도독의 후손이었습니다. 만주어로 애신은 금(金)이고 각라는 족(族)이므로 금의 후예,후손이 됩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요동총병에게 살해되었기에 누루하치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물려 받은 100명 미만의 군사로 1583년부터 니감외란(尼堪外蘭)을 공격하였고 1588년에 건주 5부를 통일 합니다. 건주 통일 이듬 해에 명 조정에서는 그를 도독첨사로 승진시켰고, 1595년에는 용호(龍虎)장군으로 봉했습니다
명의 신뢰를 쌓으면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높이는데 대하여 명 조정에서는 여진족의 진압에 도움이 된다는 데에 만족하고 그의 세력 확장을 막지 않았습니다.
여기엔 또 하나의 요인이 있는데 명말에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시기에 날이 갈수록 관리들의 착취행위가 늘어나고 세금은 과중되고 있는데다가 메뚜기 떼의 농작물 피해에다가 가믐까지 겹친데 화가 난 농민들의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난 것을 진압하는 것이 더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농민들의 봉기 중에서는 이자성의 농민군이 가장 큰 세력이 되어 북경까지 진입을 합니다.
(제 컴의 글 크기 조정이 건들려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졌습니다.
오타가 몇 군 데에 보이는데 글자 체 크게 한 다음에 손을 보겠으니 양지 바랍니다)
이자성(李自成)은 누구인가?
봉건군주 타파를 위해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 위주로 일어난 기의군(起義軍)의 지도자로 이자성이 나서자 크게 싸우지 않고서도 북경 성 밖에서는 명군(明軍)들이 앞을 다투어 환영하면서 투항하였고, 북경 진입을 하자 부성문(阜成門)과 서편문(西便門)을 지키던 명군이 이자성의 의병들을 환영하면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명말 휘종 때인 1627년 섬서 지방에 대기근이 일자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관가를 습격하면서 농민을 중심으로 한 기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홍수와 가믐 그리고 메뚜기 떼의 극성은 농민군이 각지에서 일어나는데 계기가 되었습니다. 1640년에는 농민출신 이자성이 가장 걸출한 기의군의 지도자로 부상하였습니다.
당시 만주 쪽에서는 여진족(지금은 만주족으로 통합되어 있음)이 대청(大淸)이란 이름을 내걸고 세력을 넗히고 있었고,이자성은 1644년 정월에 서안(西安)에서 건국하여 국호를 대순(大順)이라고 했고,그해 3월17일에는 북경에 진격을 했습니다
3월19일 숭정이 경산에서 홰나무에 목을 매고 죽자 명나라는 막을 내립니다.
모택동은 생전에 이자성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산당 조직시 농민출신인 이자성을 통해서 무산계급의 승리를 보면서 모택동은 머리 속에 대장정(大長征)의 계확을 이미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는 자금성의 뒷 문으로 빠져나가서 경산공원 올라가는 계단 옆의 홰나무에 목을 매고 자결합니다. 지금도 같은 자리에 홰나무가 있지만 이 나무는 모택동 시절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이 이 나무를 쇠줄로 묶어 벌을 주어서인지 죽어버렸습니다. 그 후에 지금의 홰나무를 다시 심었는데 제 북경 포스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경산공원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崇禎)이 홰나무에 목매어 자결(1644년)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만춘정에 오르기 전에 계단 옆에 괴수(槐樹)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원래의 홰나무는 문화혁명 때 사구(四舊, 즉 舊思想,舊文化,舊風俗,舊習慣은 타파되야 한다는 것)에 해당되어 문화혁명 때에 베어졌고, 지금 볼 수 있는 홰나무는 1981년에 새로 심은 것입니다.
일설에는 이 원래의 홰나무가 황제의 목숨을 지키지 못했다하여 죄를 물어서 쇄사슬에 칭칭 묶어놓고 있었는데, 연합 8군의 침입 때 이 쇄사슬 역시 약탈 당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홰나무는 제가 1995년부터 북경에서 지내면서 경산공원을 찾을 때마다 보곤 했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키가 엄청나게 커서 처음엔 못 알아봤습니다. 나무 앞의 설명 표지판을 보고서야 확인을 했던 새로 심은 홰나무였습니다.
누루하치는 부모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죽음을 맞이 한 것에 대해서 언젠가는 명나라에 대하여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을 가슴 깊이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명 조정에서 원하는 여진족들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을 잘 수행하면서 신임을 쌓아 나갔으며 자기의 세력도 점점 크게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누루하치는 여진족들을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으로 이주시키고 통일된 조직 아래 통일된 생활을 하도록 하면서 건국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누루하치는 1599년에 몽골문자를 가지고 만주어의 음을 표시하는 문자를 만들었는데 노만문(老滿文)이라고 하는데, 이 문자의 창제는 여진족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앞 몽골 제국 소개 포스팅에서 비문 내용이 내려 쓴 몽골문자는 역시 내려 쓴 만주문자와 비슷하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배경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누루하치는 1608년에는 명에 대한 조공을 중지하였고, 드디어 1616년에 칸이라 칭하고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천명(천명)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역사서에서는 북송을 무너뜨린 금(金)나라와 구분하기 위해서 후금(後金)이라고 부릅니다
이 후에 후금은 명의 동북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심양(瀋陽),요양(遼陽) 등 70여 성을 빼앗았으며, 요양얼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다가 1625년에 심양으로 옮겼습니다
1626년 누루하치는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던 중 전사합니다. 누루하치의 여덟째 아들이 4베이러인 황태극(皇太極 홍타이지)이 계위하고 칸이 됩니다
홍타이지의 릉이 있는 북릉(소릉)으로 가는 길 양 옆엔 호수가 있습니다,
북릉공원으로 심양시민들의 휴식 공간입니다
소릉은 홍타이지의 릉 입니다
북릉(北陵)과 동릉(東陵)
소릉(昭陵)으로 불리며,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의 릉원입니다. 릉이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릉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위치는 심양에 소재하는 요령성정부 청사에서 북릉공원을 끼고 조금 걸어가면 도착합니다.
소릉은 관외의 3개 릉(昭陵,福陵,永陵)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보존도 가장 잘 되어 있습니다. 청대의 다른 황제 릉들은 하북성에다 청동릉과 청서릉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명나라 황제들이 명 태조 주원장의 릉만 남경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북경 명13릉에 모여 있듯이 ~
청 태조 누루하치와 황후의 릉은 복릉이지만 위치가 동쪽에 있다하여 주로 동릉으로 불려집니다. 심양 시내에서 동쪽으로 가다보면 문화동로를 만나며 다소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행자들은 대개 북릉 하나만 보고 동릉은 시간이 부족해서 보지 못하고 귀국하게 됩니다
동릉은 청나라의 시조인 누루하치와 황후의 묘입니다
강희,건륭 두 황제 때 허가 받아 1629년~1651년에 지금의 규모로 중축을 한 것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홍타이지의 상 입니다
섹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어 있습니다
패루도 세워져 있습니다
규모가 꽤 큽니다. 삽방 모서리엔 각루도 만들어져 있으며 이 담장의 폭도 아주 넓습니다
심양고궁 입니다. 중국에는 북경의 고궁과 함께 두 개의 고둥이 있습니다
심양이 고궁은 자금성을 본따서 만들었지만 규모은 북경의 1/10 정도로 작습니다. 그러나 자금성에 비해서 작다는 것이지 실제 건축물으등은 웅장하면ㄴ서 위엄을 갖추고 있습니다
청의 말기인 서ㅍ태후가 정권을 휘두르던 시절 야편전쟁에 패라고 8개국으로 조직한 연합국 군대가 북경에 진입하여 사열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사조직으로 하여 연합국 신형 무기로 무장한 연합군과 싸우던 의화단 무리들은 황당하게 무너졌으며, 서태후는 오리발 작전으로 의화단은 청의 조정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고 발 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