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돈황석굴과 반탄비파( 反彈琵琶)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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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4일 찍은 사진 입니다
돈황시내의 중심 로타리 입니다. 한 가운데에 한 여인악사가 비파를 울러메고 연주하는 모습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반탄비파(反彈琵琶)라고 합니다.
돈황 막고굴 112호싷 벽화에 있는 그림을 보고 만든 것입니다. 저는 사진을 찍은 다음 서울에 와서 112호실에 반탄비파의 자료를 확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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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가무단의 "실크로드의 화우(絲路花雨)"라는 공연에서 반탄비파의 현장 연주를 감상할 기회가 있다면 실크로드 여행의 좋은 추억거리가 되지않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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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주랑(河西走廊)의 서쪽편에 있는 돈황은 지금은 인구 13만 명의 작은 도시이지만,실크로드를 통한 래왕이 활발했던 시기엔 천산남로나 천산북로나 돈황이 중심지였으므로 동양과 서양의 경제교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서주랑은 중국식표현이고 우리나라나 일본은 하서회랑을 많이 사용합니다. (2009년 2월 포스팅 했던 것임)
돈황(敦煌)과 막고굴(莫高窟)
돈황(敦煌)은 뜻으로 보면 성대(盛大)하다입니다. 敦은 큰 대(大)이고 煌은 성(盛)입니다 지금의 돈황시는 인구 15만 명 정도의 작은 현급시(현급시)이지만 과거엔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 목에 있으면서 동서간에 활발한 교역의 큰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한나라 시대엔 한무제가 이 서쪽의 하서주랑에 있는 돈황을 위시하여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네 곳에다가 한사군(漢四郡)을 두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한사군 설치를 두었다는 내용을 국사 시간에서 배우고 외우면서 겨우 지금까지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그리고 자명고(自鳴鼓)입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정말 한사군 설치의 지도를 그리면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정말 한사군을 한반도에 두었는가 하는 의문이 많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한사군에 대한 바른 내용으로 밝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입니다.
돈황석굴이 만들어진 이야기
돈황 막고굴은 돈황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사막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366년 락존화상(락존화상)이 중원에서 명사산으로 오는 도중에 홀연히 산 위에 금광(金光)이 번쩍거림을 보게 되었고, 마치 천 만 개의 불(佛)이 금광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락존화상은 여기가 바로 성지(聖地)라고 생각하고는 모금을 하여 절벽에다가 돈황 첫 번 째의 석굴을 파기 시작 했고 여기서 불경을 낭송 하였습니다. 이렇게 첫 석굴이 만들어지자 다른 지방의 화상들도 이곳에 와서 제2, 제3의 석굴을 만들기 시작해서 북위(北魏),북주(北周),수,당,오대(五代),송,서하(西夏) 원(元)을 거쳐오면서 도합 492개의 석굴이 만들어졌고 산서성의 대동(大同) 운강석굴, 낙양 용문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492개의 석굴 중에서 485호 굴과 486 굴은 중복이 되었기에 실제는 461개로 칩니다
제17굴은 만당시기(836~907년)에 장경동(藏經洞)이라고 불렀는데, 16굴이 1900년6월25일 왕원록(王圓菉 록은 草頭변이 아니고 竹변임)이란 도사에 의해서 이 굴의 한 벽 옆에 숨겨진 굴에서 엄청난 문화재가 감춰져 있다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5만 여의 문물이 쌓여 있었는데 이 중에 혜초의 왕오천측국전도 함께 묻혀 있었습니다.
1907년과 1914년 영국인 스타인이 돈황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사본(寫本)과 견화(絹畵),자수 등 1,2만 여의 문건을 가져 갔고, 이어서 프랑스 인이 혜초의 왕오천측국전 사본 등 6천 여 건, 1914년~15년에 러시아인이 거의 1만 건 그리고 일본 오다니를 비롯 미국인들도 많은 문물들을 가지고 갔습니다
아이로니 하게도 일본인 오다니가 가져 갔던 문물들은 지금은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제112호 굴의 반탄비파(反彈琵琶) 벽화그림을 본 따서 감숙성 가무단이 “絲路花雨(사로화우 실크로드에 내리는 꽃비)”를 공연한 바가 있고, 벽화의 그림처럼 비파를 등에다 메고 연주하는 여인의 동상이 돈황 중심 시내의 로터리 중앙에 세워져 있습니다.
돈황석굴의 문물자료들은 지금은 “돈황학(敦煌學)”까지 생겨나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현지 규정에 따라 개방된 굴은 40개에 불과한데가 한 번 현지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볼 수 있는 석굴은 겨우 6~7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