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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저우(揚州), 최치원기념관을 둘러보다(2~2) 33

콩지88 2013. 8. 19. 08:32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데는 입장료를 받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는 오른 쪽으로 최치원기념관을 먼저 보러 갑니다

 

 

연화각(蓮花閣)의 전경을 한 장 담으면서 걸어갑니다

 

 

 

2007년 10월에 만든 한중수교 15주년의 기념비도 있습니다

 

 

 

 

 

최치원기념비정 입니다

 

 

최치원기념관 안에 들어서면 오른편 벽에 첨성대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이 먼저 보입니다

신라에서 당 나라에 유학간 유학생 최치원을 신라의 수도 경주 사진을 통하여 보여주려는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아래의 최치원선생 좌상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 주관으로 양주시정부와 공동으로 양국 우의증신과 공동의 번영 발전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2007년1월16일 문화관광교류협정을 체결하고  두 도시간의 우의를 나타내는 뜻깊은 증표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화관광교류협정문이 빠져 있었고, 위 글에서도 공동 추진한다는  양주시정부의 대표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더하여 최치원이 경주 최씨의 시조라면 후손인 최씨 문중의 대표 이름이 함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당 나라의 수도 장안(長安) 그림도 걸려 있었는데, 이것은 앞 사진 신라의 수도 경주와 함께 보여주기 위한 배려인지 ?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었지만

관리인이 자리에 없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을 그냥 마음 속에 담아든채 돌아섰습니다

 

 

 

 

밖에 나와 당나라 때의 경당(經幢)을 구경했습니다

양주대학교사범대학의 당 나라 때의 사찰 유적지에서 1976년 발굴한 것인데 높이는 114cm, 둘레는 약 30cm이며, 8면에 다라니경의 서(序)를 조각해 놓은 것입니다

만들어 진 시기는 당 함통14년(873년) 6월21일이라고 했습니다

 

 

 

당 삼절비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그림,글씨 시 작가 세 사람 모두가 유명인의 것이어서 삼절(三絶)이란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당 오도자(唐 吳道子)의 그림에다가 이태백의 시며,안진경의 서체 등을 볼 수 있는 진귀한 것입니다

 

 

 

 

 

 

 

 

 

 

 

 

 

 

최치원에 대한 아래 자료는  인터넷 정보에 올려진 것을 발췌한 것입니다

 

중국 양주 최치원기념관

 

최치원 선생은 신라시대의 학자로서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이다.

중국에서는 최치원을 높게 평가해서 지난 2005년 최치원 선생이 벼슬한 양주에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청과 최치원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기념관을 만들었다.

 

선생의 자는 고운(孤雲) ·호는 해운(海雲, 부산 해운대의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해운대란 글씨를 고운 선생의 것으로 보고 있음)이며,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았다.

 

18세의 나이로 당나라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 中山覆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 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그 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 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四山碑銘);4개의 비문은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초월산의 대숭복사비, 회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퓨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섬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위의 글 자료원 : 중국 양주에는 최치원 기념관이 있다.